[문화비평 - 미술] 치바이스의 평화와 중국의 문화굴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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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호 31면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2018년 이웃 나라 중국의 미술계를 달군 작가를 꼽으라면 치바이스(齊白石, 1864~1957)를 꼽을 수 있다. 한 해 동안 중국 내외에서 다섯 차례 이상의 대규모 개인전이 열렸기 때문이다. 7월 베이징 고궁박물원과 베이징화원미술관, 11월 치바이스의 고향 샹탄시박물관에 이어 일본의 도쿄국립박물관과 12월 서울 예술의전당으로 전시가 이어졌다. 순회전이 아니라 각기 다른 계기로 조직된 이 전시들은 근대 수묵화의 거장 치바이스에 대한 오마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치바이스는 후난성 샹탄현의 빈한한 농민가정에서 태어난 목수 출신의 화가였다. 배추와 무, 천진스런 병아리와 가재 등 생활과 밀착된 서민적 소재를 질박하면서도 능숙한 필묵으로 구현함으로써 문인화를 근대화시킨 화가로 평가된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질곡 속에서 수묵화를 고수한 노령의 치바이스에게 중국 정부는 ‘인민미술가’라는 영예를 부여했고, 세계평화평의회는 ‘국제평화상’을 수여했다.

2018년의 다섯 차례 전시가 보여준 치바이스는 더 이상 지난했던 과거의 표상이 아니다. 베이징 중국미술관 소장품으로 구성된 예술의전당 ‘사여불사(似與不似)’전은 “그림의 오묘함은 닮음과 닮지 않음 사이에 있다”는 뜻의 치바이스 제화시로부터 제목을 삼았다. ‘사(似)’는 ‘형사(形似)’를 말하는 것이고 ‘불사(不似)’란 형사를 넘어서 ‘뜻으로 그린다’는 ‘사의(寫意)’를 말한다. ‘사의(寫意)’는 전통 문인화를 구성하는 미학적 요체이자, 은유와 상징으로 충만한 함축적 조형세계이다. 문인화를 부르주아 미술로 폄훼하고 부정했던 신중국 초기, ‘사의’란 미술계에서 철저히 배척됐던 개념이다. ‘사여불사’전은 계급론적 관점에서 전통을 재단했던 편협함과 결별하고, 문인화를 부활시켜 전통미술의 전면에 내세우려는 중국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장구이밍, 치바이스 초상, 1983, 종이에 채색, 중국미술관소장.

장구이밍, 치바이스 초상, 1983, 종이에 채색, 중국미술관소장.

‘사여불사’ 전이 제시한 ‘사의’의 계보는 팔대산인(八大山人)-오창석(吳昌碩)-치바이스를 잇는 문인화의 계보다. 전시는 팔대산인의 분방한 묵법과 오창석의 금석기(金石氣) 충만한 필법이 분명히 드러난 치바이스 작품을 선별하고 병치시킴으로써, 치바이스를 전통과 현대를 성공적으로 매개시킨 거장으로 구현했다. 한편의 미술사 논문을 읽는 듯, 잘 짜인 이번 전시는 중국의 성장한 문화적 역량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전시는 이에 그치지 않고 후배 화가들이 그린 치바이스 초상을 통해 그를 평화의 전령으로 소환한다. 리후(李斛)는 한 쌍의 비둘기를 바라보는 노년의 치바이스를 묘사했다. 장구이밍(張桂銘) 역시 ‘세상의 평화를 기원한다’라는 제시 아래 흰 비둘기를 응시하는 치바이스를 묘사했는데, 날아오르는 흰 비둘기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파블로 피카소가 1949년 세계평화회의를 위해 도안한 평화의 비둘기를 연상하게 된다. 중국미술관 관장 우웨이샨(吳爲山)에 의하면 비둘기는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치바이스의 아름다운 축원”을 드러낸다.

치바이스와 평화의 비둘기와의 전략적 어울림은 베이징 고궁의 치바이스전에서도 드러났다. 전시는 피카소의 비둘기가 인쇄된 국제평화상 상장과 함께, 치바이스가 수묵으로 묘사한 ‘날아오르는 비둘기’와 ‘평화’를 동시에 선보였다. 도쿄국립박물관의 치바이스전 역시 중·일‘평화’수호조약 40주년을 기념해 열렸던 것을 상기하면, 치바이스를 피카소에 버금가는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적 거장’으로 띄우려는 중국의 노력은 가히 문화굴기라 칭할 만하다. 역설적이게도 중국 역사상 정권교체기나 사회혼란기에 문인화가 흥기했음을 떠올리면 국내외 정치적 어려움에 직면한 중국이 문화외교의 일환으로 치바이스를 부활시킨 것은 시의적절해 보인다. 수묵화의 정신성이 오래전 방기되고 사의(寫意)가 이미 죽어버린 ‘사의(死意)’로 돼버린 한국화단을 생각하며 치바이스전을 보고 있자니 문화굴기, 혹은 문화융성의 의지와 방법이 무엇인지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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