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석 울산법원장 "관중이 피를 원한다고 판사가 따라갈순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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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석 울산지방법원장 [자료 : 울산지방법원]

최인석 울산지방법원장 [자료 : 울산지방법원]

“관중은 언제나 피를 원한다. 하지만 판사가 그걸 따라가서는 안 된다.”

8일 울산지방법원 집무실에서 만난 최인석 울산지방법원장(61·사법연수원16기)은 “지난 32년간 판사 생활을 하며 느낀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최 법원장은 지난 7일 대법원에 사표를 제출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를 두고 법원 내부 게시판에 ‘압수수색의 홍수’라며 검찰의 수사와 법원의 구속영장 남발 등을 정면으로 비판해 화제가 됐다.

이 때문에 그의 사직을 두고 사법부 주류 세력과의 갈등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최 법원장은 “이미 지난해 말 사직을 결심한 후 판사로서 해야 할 말을 하고자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라며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를 비판하려는 의도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간 현장에서 꾸준히 느낀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라고 말했다.

"법원, 구속 허가 남용 말고 보석 인용 높여야"  

최 법원장은 초임 판사 시절부터 형사 재판을 주로 담당했다. 소장 판사 시절부터 무리한 압수수색이나 구속 수사·재판 등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날도 그는 “검찰의 압수수색은 형사사법의 운용 방식 중 하나인데 지금처럼 ‘걸리면 된다’ 식이 아니라 좀 더 선진화될 필요가 있다”며 “법원도 검찰의 영장 청구와 압수수색을 쉽게 허가하는, 지금껏 해왔던 관행을 깰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법원의 낮은 보석신청 허가율을 지적했다. 최 법원장은 “일본의 보석 인용률은 80% 정도인데, 우리나라는 30%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며 “피고인의 인신을 구속해 수사와 재판이 이뤄지는 관행을 법관들이 나서서 깨야 하는데, 제대로 못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과거 본인이 진행했던 사건을 예로 들며 “보증금을 받고 보석을 허가한 뒤 재판 결과에 따라 실형이 나오면 그때부터 형을 살아도 늦지 않다”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보석을 돈을 받고 형을 거래하는 것처럼 여기는 잘못된 인식이 있는데 불구속 수사와 재판이 원칙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인석 울산지방법원장 [자료 : 울산지방법원]

최인석 울산지방법원장 [자료 : 울산지방법원]

최 법원장은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로 인한 법원의 어수선한 분위기에 대해 “안타깝다”고 밝혔다. 그는 “일선 판사들이 매우 의기소침해있다”며 “‘선배’ 판사들이야 이번 사건을 키운 공범 또는 방조범이 될지 모르겠지만 일선 판사들은 매우 잘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최 법원장은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구속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 대해 “단순히 개인의 일탈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누구나 그 자리에 있으면 그런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말이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임 전 차장이 법원행정처에서 일하다 보니 이 같은 사태가 발생한 게 아닌가 싶다”며 “법원행정처가 유지되든 폐지되든, 어떤 식으로든 시스템이나 인력 구조가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판사회의는 필요, 운용 방식은 고민해야" 

각급 법원에서 벌어지는 ‘판사회의’ 논란에 대해서도 그는 “전체 판사회의체는 꼭 필요한 것이지만 어떻게 운용을 해야 할지는 조율이 필요할 것”이라며 “지금의 잡음은 그 조율 과정의 하나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지난해 11월 최 법원장은 법원 내부 게시판을 통해 “각급 법원 판사회의는 우리가, (당시) 단독 판사들이 싸워서 얻어낸 것”이라며 본인을 포함한 고위 법관을 ‘적폐’로 몰아가는 젊은 판사들에게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여러 논란과 잘못된 관행에도 불구하고 최 법원장은 “사법부 전체 신뢰가 무너지진 않았다”고 말했다. 법원을 떠나면서도 “가장 믿을만한 곳은 법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예전에 국정감사에서 한 국회의원이 법원을 두고 ‘가장 믿을만한 조직이 가장 못 믿을 조직으로 변했다’고 했는데 동의하지 않는다”며 “여전히 대다수의 판사는 자신의 소신에 따라 재판을 하고 국민은 그 결과를 믿는 만큼 사법 신뢰의 한 귀퉁이가 무너지긴 했지만 전체를 흔들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연 기자 lee.hoo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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