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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너무 냉정해, 어떻게 이모랑 그렇게 다를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70)

이모와 민애의 사진. 아이들의 이모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응원해주고 격려해주면서 대화를 하고 마음을 읽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모는 식당을 해 아이들에게 밥집도 쉼터도 되어 주었다. [사진 송미옥]

이모와 민애의 사진. 아이들의 이모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응원해주고 격려해주면서 대화를 하고 마음을 읽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모는 식당을 해 아이들에게 밥집도 쉼터도 되어 주었다. [사진 송미옥]

살갑지도 않은 아들은 이모를 참 좋아한다. 표현은 안 해도 마음속에 사랑이 깊다. 오늘 문자로 대화하면서 보니 말일 즈음 내가 가는 여행길에 이모를 함께 초대 못 한 게 영 마음에 걸리는 듯하다.

‘이모는 우리 어릴 때 엄마 대신 많이 밥해줬잖아.’ ‘이모는 군대 갈 때 포항까지 와서 펑펑 울어줬잖아.’ ‘엄마는 너무 냉정하지만, 이모는 따뜻해. 하하.’

그래서 이모라고 하는 거다. 엄마는 은하철도 999의 메텔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아들의 대화에서 보듯이 부모는 아무리 잘해도 애증이 많은 존재다.

아들은 어릴 때 잔병치레를 참 많이 해서 입원을 수도 없이 했다. 돌 지난 아들과 세 살 된 딸이 같은 날 설사병에 걸려 중환자실 격리실에 눕혀 놓고는 너무 두렵고 마음이 아파서 아버지에게 울며 전화를 했더니 한걸음에 달려오셨다. 내게 아버지는 수호 천사였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철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땐 기댈 사람이 아버지밖에 없었다. 시집가면 고생 안 시키겠다고 다짐한 사위란 남자는 어디로 도피 생활하느라 곁에 없고 시부모님도 남편이 저질러 놓고 간 일을 수습하느라 병이 나서 손자를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결국 아이들을 들고 업고 먹이와 새끼보호를 책임지는 암사자처럼 당당하게 세상을 헤쳐 나가는 방법 외에는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뵙자 서러움이 북받쳐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내가 어른이 되고 보니 그때 아버지는 측은한 자식의 모습에 얼마나 애타고 마음 아프셨을지 생각하니 한심하고 부끄러운 추억이다.

아버지는 전화만 하면 와주시긴 했지만 아무 말씀 안 하시고 지켜보시다가 되돌아가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서 있어 주기만 해도 든든한 존재였다. 아이 둘을 입원시킨 그 날, 엉엉 우는 나에게 아버지는 조용히 그러나 엄하게 말씀하셨다.

“뚝 그치거라. 설사 난다고 애가 안 죽어. 엄마란 사람이 애가 곧 죽을 것 같이 그리 울면 저 어린아이가 얼마나 무섭겠나? 어떠한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말고 애 앞에서 엄마는 울면 안 돼.”

그 일이 있고 난 후 아이들 보는 앞에서는 어지간한 일에 흔들리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훗날 사춘기 학창시절 의리에 죽고 살던 아들이 별별 일에 경찰서를 들락거렸어도 나는 철의 여인처럼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주위를 돌아보니, 그때를 열정적으로 이겨낸 청춘들은 성년이 되어 순조롭게 잘살고 있는데 꾹꾹 참고 그 시기를 지나간 청춘들은 나이 들어 사고를 쳤다.

남편은 사춘기 때 가장으로서 어려움을 참고 참았다가 결혼하고 나서 욱하고 터트리곤 했으니. 사춘기 때 사고를 치고 들어오면 아이들을 잡지 말고 ‘그땐 그럴 때야’라고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려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언젠가 사춘기 때 아들이나 딸이나 담배도 몰래 피우고 술도 마시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자기를 좀 봐달라는 메아리였다. 그런데 모른 척 내버려 두었다. [중앙포토]

언젠가 사춘기 때 아들이나 딸이나 담배도 몰래 피우고 술도 마시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자기를 좀 봐달라는 메아리였다. 그런데 모른 척 내버려 두었다. [중앙포토]

언젠가 사춘기 때 아들이나 딸이나 담배도 몰래 피우고 술도 마시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일기를 훔쳐보고 알았다. 자기를 좀 봐달라는 메아리였다. 그런데 모른 척 내버려 두었다. 사실 사춘기 행동은 본인들이 이 짓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더 잘 안다. 해답을 다 알지만, 그냥 그땐 자기네들도 부모의 애간장이 타나 안 타나 실험하는 시기인 것 같았다.

살기 바빠서 밤낮으로 일해야 하는 내가 더 바빠 잔소리할 타이밍도 시간도 없으니 동생을 만나면 하소연하듯 마음속 이야기를 하며 속을 털었다. 누군가에게 속을 털고 나면 또 한 발자국 물러서서 관조할 수가 있는 여유가 생겼다. 엄마가 무쇠로 만든 로봇이 되어야 할 시기, 가장 힘 있고 중심을 잡아야 할 때가 아이들의 사춘기 때인 것 같다.

아이들이 대화할 때 부모와는 싸움한다. 그러나 한 다리 건너 제삼자의 입장에서 응원해주고 격려해주면 대화가 되고 마음을 읽어주는 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이모는 공장 바로 근처에서 식당을 했으니 밥집도 쉼터도 되어 주었다.

어느 날 조카가 내게 와서 말했다. “우리 엄마는 너무 냉정하고 차갑고 자기만 알아요. 이모랑 자매인데 왜 우리 엄마는 이모랑 다를까요?”

결론은 우리 엄마만 빼고 세상의 모든 다른 엄마는 자상하고 따뜻하다. 밥 먹으러 식당에 가서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가장 편하게 부르는 이름이 이모 아니던가? 주위에 이웃사촌 이모라도 만들어준 엄마들은 아이들이 더 잘 자란다.

아이들은 삼시 세끼 새벽밥을 해주고 24시간 해바라기를 해줬어도 자기가 알아서 컸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삶을 열심히 살면서 그냥 바라봐 주기만 하면 되는 것 같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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