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기고 싶은 이야기] 노태우 대통령 한밤 전화…“과기처 장관 맡아 저를 도와주세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1988년 과학재단 상임 이사장을 맡은 데 이어 89년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 의장까지 겸임하게 된 나는 국내외에서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그래도 과학재단 이사장 임기만 끝나면 아주대로 돌아가 에너지 시스템 연구소에서 학자로서 열정을 불태울 계획이었다.

1990년 과학기술처 장관에 임명될 무렵의 정근모 박사[중앙포토[

1990년 과학기술처 장관에 임명될 무렵의 정근모 박사[중앙포토[

그러던 90년 1월 22일 3당 합당으로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과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 김종필 대표의 신민주공화당이 합쳐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그 뒤 노 대통령은 대대적인 개각을 준비했다. 그해 3월 금요 저녁 예배를 마치고 귀가해 취침 준비를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이현우 경호실장입니다. 대통령께서 지금 통화를 원하십니다.”
예상치 못한 전화였다. 전화기 너머로 대통령이 목소리가 들렸다.
“세계적인 석학이신 정 박사께 부탁해야겠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과학기술처 장관을 맡아 주셔야 하겠습니다. 저를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중앙포토]

노태우 전 대통령. [중앙포토]

대통령의 말은 통고나 다름없었다. 나는 친구인 이상희 당시 과기처 장관이 유임될 줄 알고 있었고 대통령의 전화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청와대는 이튿날 오전 10시 개각을 발표했고 나는 아무런 준비 없이 장관을 맡게 됐다. 업무 파악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과학기술 정책에 대해선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지만 인사 행정이나 산하기관 지도 및 타 부처와의 협조는 직원들의 도움에 의존해야 했다.

우수연구센터의 하나인 건국대 동물자원연구센터 연구팀이 개를 대상으로 실험하고 있다.[중앙포토]

우수연구센터의 하나인 건국대 동물자원연구센터 연구팀이 개를 대상으로 실험하고 있다.[중앙포토]

장관으로서 최우선 과제는 명백했다. 과학재단에서 대학연구 활성화를 위해 시작한 ‘우수연구센터(SRC·ERC)’의 정착이었다. 이미 과학재단에서 지원을 시작했으며 정책구상도 마쳤기 때문에 제도적 조치와 예산 지원만 계속하면 됐다.
둘째 과제는 이미 73년 시작한 대덕연구 단지의 완공이었다. 당시 정부출연 연구소는 국가 연구과제나 산업기술 개발의 핵심이었지만 연구 인프라도 부족했고 주변에 교육·의료 시설도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 나는 미국 버지니아 메디컬 센터의 한국인 석학인 이형모 박사의 자문을 얻어 미국 국립보건센터(NIH) 실험병원의 대덕 설치를 추진했다. 의학연구기관을 세우고 기존 과학기술 연구소와 연계해 최신 의학기술을 개발하면 국민 건강 수준을 높이고 연구원과 가족도 보살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이를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했지만 내가 장관에서 물러나자마자 해산됐다. 의료계의 반응이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한국 산업계가 선진국처럼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대거 투자하고 그 결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시스템의 구축이었다. 나는 시장과 직결된 산업현장이 연구개발 요구사항을 가장 잘 알기 때문에 ‘현장 기술혁신’이 경제 발전의 열쇠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인이나 산업현장의 기술자들이 스스로 연구개발의 ‘묘미’를 알고 협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산학·산연 협력도 가능하며, 출연연구소도 활성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심하던 차에 90년 8월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황수연 기자 ciimccp@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