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교수 영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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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피의자는 1929년12월2일 평북 삭주군 대관면 대안동에서 출생, 한양대신문방송학과교수로 재직하며 88년5월부터 한겨레신문 논설고문을 겸임하고 있는 자로, 89년1월초 서울양평동2가1의2 한겨레신문 사옥2층 논설위원실에서 편집위원장 장윤환과 89년도 사업계획을 논의중 장위원장으로 부터『소련·중국 등 공산권 및 북한지역 취재활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이 취재단대표로 입북해 북한당국과 회합, 민중차원의 남북교류문제를 협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피의자는 장위원장과 함께『우리나라 현실로 불때 정부측 허락을 받아 입북취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어떠한 불이익이 있더라도 은밀히 입북하되 이로 인한 문제발생시 상황에 따라 대처하고 책임문제 발생시는 관계자들이 책임을 감수하자』고 합의했다.
피의자는 1월12일 오후2시 KAL기 편으로 출국, 동경 이와나미 서점 상무「야스에·료스케」(안강량 개)씨와 연락, 17일 오후 2시 이와나미서점 3층으로 「야스에」씨를 방문했다. 피의자는 이 자리에서『남북문제를 독점하려는 정부정책과는 별도로 민간차원의 교류도 중요하다. 한겨레신문은 민주통일 지향적 신문이기 때문에 남북 교류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고 전제, 「야스에」씨에게 한겨레신문기자단의 북한방문 취재활동을 지원해주고 김일성과의 인터뷰 주선을 요청했다. 이에 「야스에」씨가 가능한 방법을 통해 노력하겠다며 피의자에게 방북주선을 요망하는 내용의 서면 작성을 요구, 『야스에 료스케』라는 제목의 문서를 작성했다.
피의자는 이 서면을 통해『우리는 이제 북의 동태 및 사회에 보다 적극적인 이해의 확대를 필요로 하고있다』『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정부는 남북간 문제해결을 독점하고 있다. 우리는 민중적 주체성으로 남북간 민족문제를 해결해야한다는 신념이다』『그러기 위해 민중적 차원의 남북접촉이 시급하고 정부에만 맡겨놓을 수 없다. 또 북한지도자와 당과 정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북한당국의 허가가 단순히 보고 듣는 바를 보도하는 차원이라면 경험있는 기자 2명과 사진기자 1명 정도의 입국초청을 얻어주고 북의 당정책과 정부의 책임있는 수준의 분들과 면담이 수락된다면 논설위원급을 단장으로 하는 취재기자단을 인솔하겠다』『바람직한 것은 존경하는 김일성주석각하와 잠시라도 직접 대화하는 귀중한 시간을 허락 받는 것이다. 그것이 허용된다면 남에서의 그 효과는 절대적일 것으로 생각한다』『내가 직접 그 어렵고 명예스런 일을 맡아야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무거운 짐을 질 각오다』『가능한 한 최단시간내에 회답 있기를 기대한다. 북의 당국기관에도 우리와 나자신의 뜨거운 충정을 이해하도록 힘써달라』는 내용을 한글 및 일본어 두가지로 작성했다.
피의자는 3월초 서울 종로YMCA호텔에 투숙한「야스에」씨의 연락을 받고온「다카사키· 쇼지」교수(일본 가나카와켄 대학)를 만나「야스에」씨의 연락을 받았다.「야스에」씨는 피의자가『제의한 입북이 가능할 것 같다. 고위층 접촉도 가능할 것 같으니 구체적인 시기와 방법을 결정해 알려달라』고 통고했다.
피의자는 3월5일 오후4시 한겨레신문사 논설위원실에서 임재경 부사장·장윤환 편집위원장에게 이 같은 사실을 설명한뒤▲기자단입북시기는 5월15일 전후 10일로 하고▲기자단은 피의자가 인솔하되 권근술 편집부위원장, 문학진 기자, 국제부기자1명, 사진부기자 등 5명으로 하고▲입북방법은 일본·북경을 경유, 입북하는 방안과 유럽을 통해 제3국을 경유, 입북하는 방안 중 북측이 제시한 방안을 따르기로 한다는 구체적 입북추진계획을 결정했다.
피의자는 3월8일께 「다카사키」교수를 다시 접촉, 이 결정사항을 통고해 일본에 있는 「야스에」씨에게 전달케 함으로써 반 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탈출을 예비음모한 자로서 구속하지 않으면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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