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강찬호의 시선

야당 원내대표에 온 괴전화…기자 사칭하며 사생활 캤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김성태 원내대표님, 저는 XXX 기자입니다. 지난주 금요일 저녁에 ○○○씨랑 만나셨지요?”

김성태, 여의도 밖에서 식사 … 비서, 검찰에 통화 내역 조회당해 #여당도 서로 조심하며 청와대 눈치 봐 … 전 정부 시절과 ‘데자뷔’

“댁은 누구요? ”

“기자입니다” “기자 맞소? 우리 당 출입 기자 중에 들어본 이름이 아닌데? ”

“….” “당신 누구요? 기자 아니지? 누구한테 사주받고 남의 사생활을 캐물어!”

“딸칵(전화 끊는 소리).”

청와대 특별감찰반 출신 김태우 수사관이 “야당 정치인과 언론 동향을 (청와대) 상부에 보고했다”고 본지에 밝힌 19일 아침. 자유한국당 김성태 전 원내대표는 재직 시절 이런 괴전화를 여러 번 받았다면서 “김태우 말이 사실일 개연성이 있다”고 했다.

“원내대표로 일한 지난 1년 동안 끊임없이 이상한 친구들이 출몰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언론인 운운하면서  내 주변에 접근해 뒷조사하는 식으로 캐물었다. 취재를 핑계로 사생활에 해당하는 희한한 내용을 물어오더라. 내가 ‘누구 지시받고 이런 짓거리를 하나’라며 박살을 내니까 쏙 들어가더라. 그리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곤 했다. (어느 매체 기자라고 하던가?)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매체여서 지금 기억도 안 나.”

김성태는 이런 괴전화가 자주 걸려오자 사람을 만날 때 국회 주변을 피하는 버릇이 생겼다. 국회의원들은 통상 국회 청사 건너편 ‘서여의도’ 지역의 식당에서 사람을 만나지만 김성태는 국회와 멀리 떨어진 동여의도 지역이나 여의도 밖에서 사람을 만나곤 한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 안기부나 경찰의 감시를 피해 ‘모처’에서 사람을 만나야 했던 민주당(당시 야당) 의원들과 다름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정치인이나 민간인 사찰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문재인 정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이뿐 아니다. 김성태 의원실에 근무하는 한 비서는 최근 자신의 휴대전화 통화내역을 “누군가 들여다본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 통신사에 자신의 통화 조회 내역을 문의했다. 결과를 받아든 그는 경악했다. 검찰이 자신의 통화 내역을 여러 차례 조회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격분한 비서는 검찰에 항의했다. 돌아온 대답은 “강원랜드 특혜채용 의혹과 관련해 알아볼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비서는 공채를 통해 국회에 일자리를 얻었을 뿐 강원랜드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놀란 김성태 의원실의 보좌진은 줄줄이 자신들의 휴대전화 통화 조회 내역을 통신사에 신청한 상태다.

의원실 관계자는 “보수 정부 시절 검찰이 정치권 인사 통화 내역을 들여다본다는 괴담이 횡행하긴 했지만, ‘사찰의 ’사‘자도 안 하겠다’던 문재인 정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이런 내로남불이 없다”고 했다. 그는 “대여 강경 투쟁에 앞장선 야당 원내대표에게 한 방 먹일 일 없을까 해서 수사기관이 ‘오버’한 것 아닌지 의심이 간다”고도 했다.

야당이 정부 기관의 ‘사찰’ 가능성에 떨고 있다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자체 검열’이 두려워 몸을 낮추고 있다. 한 비문 중진 의원은 “요즘 우리 당은 ‘5호 담당제’로 돌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했다. 의원이 3~4인 이상 모이면 “대통령 잘한다”만 합창한다. 그러나 서로 친한 두 의원끼리 사석에서 만나면 말이 달라진다.“청와대가 큰일이다” “대통령 비서실 독주에 제동을 걸 때다” 같은 말이 봇물처럼 쏟아진다는 것이다.

비문 중진 의원의 한탄은 이어진다. “최근에 유일하게 청와대에 ‘이건 아니다’고 발언한 이가 조응천 의원(초선·남양주갑)이다. 청와대 특감반 비위 의혹이 불거지자 ‘조국 민정수석이 사의를 표하는 게 올바른 처신’이라고 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이해찬 대표가 ‘조국은 잘못 없다’고 쐐기를 박았다. 또 김한정·표창원·손혜원·민병두 의원이 잇따라 조국을 옹호하는 메시지를 날렸다. 조응천은 순식간에 ‘왕따’가 됐다. 의원들이 그를 만나면 대화를 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니 앞으로 청와대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어떤 의원이 목소리를 내겠는가.”

또 다른 비문 의원도 가세했다. “요즘 당에서 의원총회 한번 여는 걸 못 봤다. 의총을 열면 청와대 입장과 다른 말이 나올까 봐 알아서 기는 모양새다. 명색이 집권당 의원들이 문재인 대통령 만나는 건 꿈도 못 꾸고 이해찬 대표 만나기조차 힘들다. 박근혜 정권 때 새누리당 신세와 뭐가 다른가 싶다.”

문 대통령 책임이 적지 않다. 대통령 시절 하루 세끼를 사회 각계 인사들과 먹으면서 의견을 들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달리 문 대통령은 ‘혼밥’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 접촉도 가물에 콩 나듯 한다. 그 빈 공간을 대통령 참모진이 파고들면서 전횡을 저지를 여지는 커질 수밖에 없다.

문 대통령이 바뀌어야 한다. 여당은 물론 야당과도 자주 소통해 쓴소리를 듣고 옳은 건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 “우린 유전자가 다르다”며 제 식구 감싸기에 올인하는 독선과 민간인에 대한 불법적 ‘정보 수집’도 접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리 김태우를 잡아 재갈을 물려봤자 제2, 제3의 김태우가 계속 나올  것이다.

강찬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