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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박이도 뭘 먹을지 고민···전주에 맛집이 없는 이유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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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8)

전주는 맛 뿐 아니라 한국적인 풍류가 남아있는 도시다. 지난 6월에 한옥마을 경기 전 앞에서 펼쳐진 2018년 전주대사습놀이 전야제. [사진 박헌정]

전주는 맛 뿐 아니라 한국적인 풍류가 남아있는 도시다. 지난 6월에 한옥마을 경기 전 앞에서 펼쳐진 2018년 전주대사습놀이 전야제. [사진 박헌정]

중앙 SUNDAY에 '이택희의 맛따라기-전주의 뿌리 깊은 맛집 5선'이라는 칼럼이 실렸다. 외지인들이 맛의 도시 전주를 찾았다가 실망했다는 말에 전주 지인의 안내로 훌륭한 맛집들을 찾아다녔다는 내용이다. 맛이 그대로 전해지는 글을 읽으니 나도 찾아가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전주의 음식문화에 대해 뭔가 더 부연설명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요리를 할 줄 알고 먹기도 즐기지만 요즘 대세인 ‘요리전문가’는 아니다. 서울 출신인 나는 대학 시절부터 전국 각지를 두루 여행하다가 어느 순간 전주의 매력에 푹 빠졌고, 급기야 전주에서 살 계획으로 집까지 마련했다. 몸은 아직 서울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전주에 가 있다. 이렇게까지 전주를 좋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전주만이 가지고 있는 ‘풍류’ 느낌 때문이다.

몇 가지 이미지만 소개하자면, 한옥마을과 전주교대 사이에 전주천을 가로질러 놓인 남천교 위에는 청연루라는 신식정자가 있다. 아주 넓은 대청마루에서 시민들이 쉬도록 해놓은 것을 보면 전주의 여유로움이 보인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술을 주문하면 주인 마음대로 안주가 계속 나오는 막걸릿집이나, 구멍가게 테이블에서 시원한 병맥주 한잔 마시던 것이 ‘가맥(가게맥주)’의 전통으로 이어진 것, 전주천이 내려다보이는 한벽당 아래 평상에서 바람맞으며 오모가리탕에 소주잔을 비우는 것, 이런 게 바로 전주의 술맛이었다.

가게 앞 테이블에서 북어포나 땅콩 같은 안주에 시원한 맥주를 한 잔씩 마시던 것이 ‘전주가맥’이라는 술 문화로 자리잡았다. 활기찬 분위기와 저렴한 가격이 매력이다. [사진 박헌정]

가게 앞 테이블에서 북어포나 땅콩 같은 안주에 시원한 맥주를 한 잔씩 마시던 것이 ‘전주가맥’이라는 술 문화로 자리잡았다. 활기찬 분위기와 저렴한 가격이 매력이다. [사진 박헌정]

내가 생각하는 풍류란 술과 노래와 춤, 그리고 그 속에서 여유롭게 깨닫는 인생의 값어치다. 전주에는 판소리 한 자락씩 뽑을 줄 아는 사람도 많다. ‘전주대사습놀이’는 너무나 유명하지 않는가. 이런 독특한 흥이 없다면 전주는 그저 작고 가난하고 조용한 지방 도시일 뿐이다.

전주의 두 번째 매력은 역시 ‘맛’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맛의 도시는 맞는데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지인들이 “전주에 가면 어디에서 뭘 먹을까?”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하다. 전주 토박이들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한다. 왜 그럴까?

내 생각에는 ‘맛의 도시’라고 하면 사람들이 맛에 대한 높은 수준을 지녔다는 것이지 맛집이 많다는 뜻은 아닌 것 같다. 만일 김연아나 박태환이 올림픽을 3연패 했다면 한국은 ‘피겨의 나라’, ‘수영의 나라’가 되었을까. 그런 식이라면 ‘맛의 도시’, ‘교육의 도시’, ‘예술의 도시’ 등 모든 ‘○○의 도시’는 서울 차지가 될 것이다.

실제로 주변의 전주 사람들을 보면 전주를 ‘미향(味鄕)’이라 할 만큼 맛에 대한 조예가 깊다. 전국 어디에나 ‘전주식당’ 없는 곳 없다. 일단 반찬 가짓수나 간이 입에 착착 맞는 것은 기본이고, 전주 사람들은 좋은 음식을 알아보고 즐길 줄 안다. 그리고 공들여 잘해 먹는다.

전주에 딱히 떠오르는 맛집은 없지만 전국 곳곳에 퍼져있는 ‘전주식당’ 상호는 전주가 곧 맛의 브랜드임을 입증한다. [사진 박헌정]

전주에 딱히 떠오르는 맛집은 없지만 전국 곳곳에 퍼져있는 ‘전주식당’ 상호는 전주가 곧 맛의 브랜드임을 입증한다. [사진 박헌정]

어릴 때부터 집집마다 그렇게 먹고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외식업의 키워드인 ‘단짠(달고 짠)’ 대신 간간하고 옅으면서도 주재료를 살리는 감칠맛, 내가 느끼는 전주의 맛은 그렇다. 전라도 말로 ‘개미가 있다’고 한다.

전주의 맛집에 대한 기사만 나오면 악플이 엄청나다. 여행 와서 크게 실망했던가 보다. 그런데 서울이든 지방이든 맛집은 그 지역 음식 맛이 아니라 외식산업 규모와 비례한다. 인구 60만의 전주는 바깥에서 밥 사 먹는 직장인도 많지 않은 곳, 당연히 외식문화는 관광객 중심의 문화다. 그러니 현지인에게 맛집을 물어보면 어떤 추천을 할 수 있을까. 이건 제주, 속초, 통영, 어디나 마찬가지다.

외지인이 만들어낸 이미지가 너무 많다. ‘전주=비빔밥’ 등식이 정말 강한데 전주비빔밥에 특별한 유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전주사람들은 “왜 여기서 그걸 찾냐?” 묻는다. 워낙 유명하니 기념 삼아 먹어볼 수는 있겠지만 이곳 사람들은 분식집에서 계란후라이 하나 더 추가해서 비벼 먹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도 “전주의 맛집은 어디냐?” 집요하게 묻는다면 아무 곳이나, 가령 기사 식당이나 동네 백반집이라도 들어가 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속는 셈 치고 말이다. 아니면, 전주 사는 친구의 부모님 댁을 찾아뵙든지.

오모가리탕은 오모가리라는 뚝배기에 쏘가리, 메기 같은 민물고기를 진하게 끓여낸 매운탕이다. 주문 받아 새 밥을 짓고 누룽지까지 내준다. 전주 음식문화의 특징은 한 마디로 ‘잘 먹고사는 것’이다. [사진 박헌정]

오모가리탕은 오모가리라는 뚝배기에 쏘가리, 메기 같은 민물고기를 진하게 끓여낸 매운탕이다. 주문 받아 새 밥을 짓고 누룽지까지 내준다. 전주 음식문화의 특징은 한 마디로 ‘잘 먹고사는 것’이다. [사진 박헌정]

끝으로 전주의 음식문화와 정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먹는 것에 대한 존중감이다. 오래전에 전주 외곽 어디였던가, 목이 말라 구멍가게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을 꺼냈더니 머리 하얀 할머니가 병을 잡아채셨다. 병을 들고 가게에 붙은 살림방으로, 어디로 다니시더니 맥주와 잔, 그리고 무와 마늘쫑 몇 조각 놓인 접시를 개다리소반에 받쳐 건네주셨다. 나그네로부터 무료함을 달래시려는 줄 알았는데 그냥 저쪽 그늘로 가서 쉬셨다.

이런 여유와 관심과 정성이 어떤 형태로든 담기는 것이다. 좀 더 먹여 보내야 하고, 그릇에 담더라도 예쁜 그릇에 가지런해야 하고, 정성 들여 만든 거니까 먹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싶은 마음, 그 보편적인 심성이 모여 문화가 된다. 그걸 생각하지 않는다면 전주의 식당들을 어찌 서울의 대형 음식점들과 비교하겠는가.

실력이 있으면 다 서울로 모여드니 최고는 전부 서울에 있는 게 현실이다. 서울과 다른 것을 찾는다면 모를까. 그러니 전주에서는 ‘맛’도 중요하지만 그 깊은 ‘음식문화’도 함께 느껴보기를 제안한다.

박헌정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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