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 13. 환자를 위한 병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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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88년 길병원과 토마스 제퍼슨 의대의 자매결연 조인식에서 닥터 고넬라(左)와 함께 한 필자.

최근 선진 의료시스템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해외 탐방에 나서는 의료기관들이 적잖다. 사실 의료시장 개방을 앞두고 있기에 선진 의료시스템 도입은 절박하다. 그런 면에서 난 행운아다. 우리나라 의료시설이 낙후돼 있던 1960년대에 미국의 선진 의료시스템을 체득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수련기간에 본 모든 의료현장은 그대로 귀감이었고, 의학도로서 배워야 할 교과서였다.

인턴시절 내과에 배치됐을 때 폐렴에 걸린 백인 노(老)신사를 회진한 적이 있다. 그 환자는 자기가 걸린 병의 원인균이 무엇이고, 치료제로 맞고 있는 페니실린 주사의 용량과 치료 효과, 부작용의 가능성까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심지어 앞으로 사흘 뒤면 퇴원할 것 같다는 말까지 했다. 마치 의사가 의무기록을 읽듯 자신의 치료 과정을 상세히 알고 있는 환자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의사가 환자에게 알기 쉽게, 거듭 설명해주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세기 전인데도 미국에선 의료진이 환자의 알 권리를 존중해 충실하게 설명의 의무를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에서 진한 감동이 밀려왔다.

내가 환자로서 직접 수술대에 올라 미국 의료시스템을 경험한 일도 있다. 난소에 생긴 주먹만한 혹을 제거하기 위해 여느 환자처럼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때 수술의사는 불안해 하는 내 손을 잡아주며 "치료가 잘 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안심시켰다. 의사의 말 한마디가 환자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깊이 깨달은 순간이었다. 내가 지금도 산모 엉덩이를 다독거리며 "걱정하지마, 내가 도와줄게"라고 말하는 것은 그때 배운 '노하우'다.

미국 의학이 세계를 주도할 수 있었던 데는 환자와 가족의 인식도 한 몫했다. 당시에는 자기공명영상기(MRI).양전자단층촬영기(PET)와 같은 첨단 진단장비가 없었다. 가장 대중적인 장비가 X선 장비였으니 치료받다 사망하더라도 원인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면 의사는 병명을 밝혀내기 위해 가족에게 해부의 필요성을 자세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가족이 병원 측 요구에 동의해 시신을 내주는 것이었다.

가천의과대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토마스 제퍼슨의대 닥터 고넬라 교수는 'What's a good doctor?'라는 주제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년 가깝게 학장을 지낸 그의 첫째 지론은 '의사는 환자를 빨리, 잘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실력 있는 의사가 돼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는 '설명을 잘하는 의사가 되어라'고 한다. 마치 환자에게 질병에 대한 것을 교육하듯 말해주라는 주장이다. 마지막으로는 '경영을 알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의사도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다. 난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자면 '가슴으로 치료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야 존경받고 사랑받는 의사가 될 수 있다.

환자의 눈높이에서 '친절하게 설명을 잘해야 한다'는 내 의사관은 미국 수련과정에서 얻은 소중한 경험의 결과였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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