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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하게 살지 마라, 무슨 짓이든지 해라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성희의 천일서화(13)

시란 참으로 오묘하다. 몇 마디 말로 인간의 희로애락과 자연을 그려내어 감동을 울리는 것이 여간 솜씨가 있고는 힘든 경지라 여겨진다. 수십 년 동안 글과 관련된 일을 해오고, 그야말로 다섯 수레에도 넘칠 만큼 책을 읽었지만 시란 하늘이 내려준 재능을 가진 이만 쓸 수 있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이는 잘 쓰인 시에 한한 감탄이다. 구닥다리 표현을 빌리자면 음풍농월에 그치거나, 감상적인 형용사 범벅으로 애잔한 감정을 노래한 시는 별로다. 붓방아질에 불과해 보여서다. 자못 심오한 듯 알아먹을 수 없는 ‘실험’도 끌리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뭔가 제법 깊은 뜻을 담은 듯하기는 한데 이해가 가지 않으니 몇 줄 읽다가 팽개치기 일쑤다.

군사정권 시절, 주의 주장을 토해내느라 분주해 마치 구호를 쏘는 것 같던 시들 역시 당기지 않는다. 소시민에 불과한 나로선 코앞에 걸린 목적의식에 지레 질려 읽어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자니 내가 좋아하는 시는 제한적이다. 문학을 하는 이들 또는 문학적 ‘내공’이 깊은 이들이야 뭐라 하든 시대의 흐름을 짚고, 생각 없는 일상을 일깨우는 시인과 시가 내게는 명시다.

시인 김광규. 그의 대표작 중 하나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이다. 권혁재 기자

시인 김광규. 그의 대표작 중 하나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이다. 권혁재 기자

김광규란 시인이 있다. 고교 시절 은사라는 개인적 인연도 작용했지만 문학적 성취와 비교하면 대중적으로 덜 알려진 분이란 생각을 줄곧 한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란 시를 뒤적인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부끄럽지 않은가/부끄럽지 않은가/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어찌 보면 대중가요 제목 같은데, 그리 길지도 않은데, 4·19혁명 세대-굳이 4·19세대뿐일까마는-의 소시민화를 낮은 목소리로 아프게 그려낸 명품이다. 가만히 읽으면 리드미컬한 이 몇 줄에 한 편의 소설 뺨치는 이야기가 담겼다. 이건 1979년 출간된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문학과 지성사)에 실렸는데, 2001년 나온 시집 『아니다 그렇지 않다』(문학과 지성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나의 자식들에게’도 서늘하긴 마찬가지다.

“위험한 곳에는 아예 가지 말고/의심받을 짓은 안 하는 것이 좋다고/돌아가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면/인생이 힘들 것 무엇이랴 싶었지만/그렇게 살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집에만 있는 것도 위험하고/아무 짓을 안 해도 의심 받는다/조용히 사는 죄악을 피해/나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하겠다/평온하게 살지 마라/무슨 짓인가 해라/아무리 부끄러운 흔적이라도/무엇인가 남겨라”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들이 더 긴 처지에선 좀 더 일찍 읽었더라면 내 삶은 약간은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에 잠기기에 하는 시이다. 나이가 들면서 새삼 와 닿는 작품은 이뿐만이 아니다.

시인 김광규의 시집들.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아니다 그렇지 않다』, 『좀팽이처럼』. [사진 문학과지성사 홈페이지]

시인 김광규의 시집들.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아니다 그렇지 않다』, 『좀팽이처럼』. [사진 문학과지성사 홈페이지]

“창고마다 지저분하게 널려진/수백만 개의 나사들/크기만 다를 뿐 모두 비슷한/암나사와 숫나사들을/한 번도 눈여겨본 적이 없다…그러나 한 개의 나사 때문에/귀중한 목숨을 잃기 전에/그리고 한 개의 나사를 갈아 끼우기 위하여/수천 개의 나사를 풀어야 하기 전에/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느냐”

『좀팽이처럼』(문학과지성사)에 실린 ‘나사에 관하여’란 시다. 평범한 장삼이사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하지만 요즘 세상을 움직이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작품이다. 20권 가까운 시집을 좇아 읽노라면 시인은 시대의 파수꾼이라는 누군가의 말을 실감한다. 교과서나 내가 읽은 그 숱한 명저 대작보다 김광규 시인의 작품들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기에 하는 이야기다.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jaeja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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