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눈 내리는 날 장작 타는 방에서 바깥 세상 바라보며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권대욱의 산막일기(17)

눈으로 뒤덮인 산막. [사진 권대욱]

눈으로 뒤덮인 산막. [사진 권대욱]

눈! 첫눈이 내린다. 첫눈이라 내 맘은 벌써 산길을 달려간다. 내 마음은 이미 산막. 장작 난로 활활 타는 방안이나 독서당에서 바라보는 눈은 얼마나 황홀했던가. 이럴 때는 어김없이 김효근의 ‘눈’을 불렀다. 이 세상 어딜 둘러봐도 산막만큼 이 곡의 정서를 더 잘 대변하는 곳을 보지 못했다.

원두막에 서 있노라면 굽이진 조그만 산길이 보이고 그 산길에 하얀 눈이 곱게 쌓이면 나는 한 마리 외로운 새가 되어 마구마구 산길을 헤매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마음뿐. 몸이 따라주지 못하니 이 또한 세상에 매인 마음으로 세상 밖의 일을 하는 것이리라. 언제인가. 마음 따라 몸 따라 자유자재가 될 날은….

조그만 산길에 흰 눈이 곱게 쌓이면
내 작은 발자욱을 영원히 남기고 싶소
내 작은 마음이 하얗게 물들 때까지
새하얀 산길을 헤매이고 싶소
외로운 겨울새 소리 멀리서 들려오면
내 공상에 파문이 일어 갈 길을 잊어버리오
가슴에 새겨보리라 순결한 님의 목소리
바람결에 실려 오는가 흰 눈 되어 온다오
저 멀리 숲 사이로 내 마음 달려가나
아 겨울새 보이지 않고 흰 여운만 남아있다오
눈감고 들어보리라 끝없는 님의 노래여
나 어느새 흰 눈 되어 산길 걸어간다오

세상에 얽힌 마음으로 세상 밖 보는 마음

눈 떠보니 눈 덮인 산하, 흑백사진 동화 같은 세상이 펼쳐진다. 순간 나는 들어오길 잘했다 싶다. 모든 것이 고마워지는 순간이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 무엇이든 생각날 때 해야 하나 보다. 멈칫거리고 미루다 보면 못하게 되고 후회하게 된다.

장작 난로 타는 따뜻한 방안에 앉아 바람불고 추운 세상을 보는 마음, 이것이 세상을 떠난 마음으로 세상일을 하고 세상에 얽매인 마음으로 세상 밖을 보는 마음 아닐까 한다. 그 마음자리 다를 바 없을진대 결국 모든 게 마음 아니겠나. 그러니 이 삶 성심으로 살 도리밖에 없지 싶다.

자유가 있는 산막. [사진 권대욱]

자유가 있는 산막. [사진 권대욱]

2주 만의 산막이다. 별일 없기를 기대했지만 역시 별일은 있었다. 아래층 쪽방 바닥에 물기가 있고 침대 시트도 젖어 있다. 살펴보니 천정으로 물이 떨어진 듯하다. 한밤이라 대충 치우고 아침에 살펴보니 보일러실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닥트에서 계속 물이 떨어지고 있다. 겨울철 동파 방지를 위해 2층으로 올라가는 수도 밸브를 차단하고 드레인까지 해놨었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고였던 물이 얼었다. 보일러 열기에 녹았던가? 이 겨울에 이걸 어찌 고치나 머리가 많이 복잡하지만 늘 그랬듯 이내 마음에 두지 않기로 한다. 분명 원인은 있을 것이고 원인은 찾으면 될 것이고 찾아지면 고치면 될 것이다. 다만 이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바로 최 사장께 전화한다.

나: 최 사장! 천정에서 물이 새네. 밸브도 닫고 드레인도 시켰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최: 드레인이 제대로 안 됐나 보네요.
나: 어떡하나, 좀 들어와 고쳐주소.
최: 예, 알겠습니다.

순간 나의 근심은 사라지고 만다. 말 한마디에 군말 없이 일해주고 일하고도 돈 달라 소리도 안 해 늘 내가 독촉하고서야 돈 받아가는 이 사람. 전화기 너머로 교감 되는 묵직한 신뢰와 우정. 오늘따라 더없이 고맙다. 산막 생활에 이런 일은 자주 있다. 그런데도 지난 20여년 큰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신뢰로 쌓인 이런 우정과 믿음 때문 아닌가 싶다.

세상 사는 이치 또한 같다. 사람 사는 일도 그렇고, 일 또한 다르지 않다. 혼자 끙끙 앓지 마라.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받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라. 먼저 신뢰를 쌓고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내가 먼저 도우라. 그래야 이런 도움도 받을 수 있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사진 권대욱]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사진 권대욱]

얼마 전부터 장작 난로 피우면 방안에 연기가 자욱하고 눈이 매워 자세히 살펴보니 연통에서 연기가 솔솔 샌다. 연통이 막혔나 보다. 하기야 난로 놓은 지 어언 10여년인데 청소는 단 한 번밖에 안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싶다.

만사제폐하고 연통 대청소부터 해야겠다. 작업계획을 머릿속에 그린다. 전동 드릴로 피스 풀고 연통 분해하고 일도 남아 있다. 햇볕 좋은 오후 군고구마 한 덩이에 무 슬라이스 몇 개, 엘가의 묵직한 첼로 소릴 듣는다.

사람이라 다 사람 아니듯, 불이라 다 같은 불이 아니다. 전깃불, 히터 불, 난롯불, 장작불, 불, 불, 불… 불도 많지만 뭐니뭐니해도 으뜸은 활활 타는 장작불이지 싶다. 춤출 줄 알고, 배고플 줄 알고, 죽을 줄도 아니 살아있는 불인 것이다. 편이와 감동은 늘 반비례한다. 사람 또한 이와 같다. 감동 있는 사람이 되자.

권대욱 ㈜휴넷 회장·청춘합장단 단장 totwkwon@hunet.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