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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11월 수상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장원>

하늘 계단
-예숲 (본명 허순옥)

희붐한 꼭두새벽 골목 안 단독주택
비정규직 야근 마친 옥탑방 샛별 하나
철계단 삐꺽거리며 녹슨 시간을 당긴다

옥상에만 사는 바람 발목을 휘감지만
내딛는 앞발이 뒷발을 몰고 간다
세상을 견인하듯이 오른발 왼발 오른발

온몸을 휘감는 돌개바람 견딜 수 있게
삐뚜름 닳은 뒷굽 신발끈 단단히 조여
발목의 각도와 방향을 조심조심 가늠한다

저만치 옥상 위 푸른 하늘 당기면서
새벽 여는 수탉처럼 날숨 크게 내뱉고
정규직 그날을 위해 뒤꿈치 바투 세운다

◆허순옥

허순옥

허순옥

1949년 경북 영천 출생. 제11회 신라문학대상 소설부문 대상 수상. 2016 전국정조숭모백일장 수원인문학글판 우수상. 2017 중앙시조 월백일장 차상 수상.

<차상>

샐러드 바
-권선애

기호 1 기호 2 기호 3 기호 7
시든 나라 살린다는 소리를 트럭에 얹고
바닥난 민심을 골라 맛있는 냄새 풍긴다

가는 곳마다 잘 차려진 공손한 말솜씨
목 터지는 7의 연설은 제값을 할 수 있을까
공약을 편식한 내 귀 덤으로 살이 찐다

곳곳에 양념으로 내걸린 현수막
골라 먹을 약속들은 샐러드 바 차림처럼
알면서 중독된 그 맛 그 나물에 그 밥인데

<차하>

수첩에 적힌 꿈
-원순자

전쟁터에서도 깨알같은 꿈이 자란다

고향에 꼭 가야지
어머니 만나야지

몽당 밭
씨 뿌려야지
아이 셋은 낳아야지

<이달의 심사평>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을 목표로 이번 달에도 노작들이 쏟아졌다. 오랜 숙의 끝에 녹슨 시간을 당기는, 예숲(허순옥)의 ‘하늘계단’을 장원으로 올린다. 이 시조를 숙독하며 오늘 우리 사회의 모범적이고 전형적인 변방의 군상들을 보았다. 정규직을 향한 계단을 오르는 화자의 뒷모습이 왠지 페이드 아웃의 스크린을 떠올리게 한다. “정규직 그날을 위해” 그는 오히려 “세상을 견인하듯이 오른발 왼발 오른발”로 “앞발이 뒷발을 몰고” 여명을 밝히는 수탉이 된다. 시인에게 언어는 각자의 비밀병기다. 한물 간 정규직의 소재를 자신의 언어로 소화하는 조탁 능력이 돋보인다.

차상으로는 권선애의 ‘샐러드 바’를 뽑는다. 샐러드바는 언제나 먹을 것이 풍성하지만 성찬만 요란할 뿐 정작 질은 반비례하는 횡행에 무던히 속아 살았다. 선거공화국이 된 제도의 적나라한 후유증을 샐러드바에 비유한 것이 적중하고 있다. 세 수 종장마다 이항대립의 병렬로 구성함으로써 의미가 더욱 깊어지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시는 언어의 조합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자신만의 언어와 표현이 필요하다. 특히 시조는 삼박자의 스텝 위에 리듬의 탄력성을 살려야 한다.

차하로는 원순자의 ‘수첩에 적힌 꿈’을 택한다. 단아하고 소박한 꿈속에서 서사구조로 엮은 백미다. 꿈은 생명의 원천이다. 고향에 돌아가서 어머니를 만나고 씨 뿌리고 싶은 이 작은 소망이 오히려 절박하게 다가온다. 행간에 숨겨진 기나긴 인생사를 상상하며, 이 시대에 “아이 셋은 낳아야지”하는 꿈은 절대 작지 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다시 나짐 히크메트(Nazim Hikmet)의 시-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고 한다. 출사표를 던진 강병국 구관모 정광영 황남희의 끝없는 도전이 가장 빛나는 별이 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이종문·최영효(대표집필: 최영효)

<초대시조>

위양못 
-김덕남
젖내 문득 그리운 날 위양못 찾아간다
물속 하늘나라 가도 젖지 않는 백로 날개
높아서 더 깊어지는 새의 길이 보인다

신음도 진통제도 흘려보낸 못불 아래
푸드득 깃을 치며 손 흔드는 고운 엄마
낮아서 더 넓어지는 물의 길을 읽는다

◆김덕남

김덕남 시조시인

김덕남 시조시인

1950년 경주 출생.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젖꽃판』 『변산바람꽃』 현대시조 100인선 『봄 탓이로다』. 시조시학 젊은시인상, 한국시조시인협회 올해의시조집상 및 신인상 수상. 현재 부산여류시조문학회장.

아라파흐 족의 인디언들이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부르는 11월은 성찰과 사색의 달이다. 시인은 반영이 아름다운 밀양의 위양못을 찾아가 ‘위양못’이란 거울을 통해 마음 심연에 자리한 어머니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성찰해 낸다. M. H. 아브람스는 저서 『거울과 램프』에서 거울과 램프를 문학의 가장 큰 상징으로 보고 거울이란 어떤 것을 비추어 보여주는 반영성이 강조된 것이고, 램프란 스스로 빛을 발하는 존재성이 강조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 작품에서 생생한 감각으로 구현된 거울인 ‘위양못’은 자의식의 공간이며 낯선 익명의 세계이다. 모정이 그리워 찾아간 위양못에서 시인은 ‘물속의 백로’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내적 인격을 부여하여 동화시킨다. 고려가요 『청산별곡』 의 “가던 새 가던 새 본다/ 믈아래 가던 새 본다/ 잉무든 장글란 가지고 믈아래 가던 새 본다”에서 ‘믈아래 가던 새’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생의 무력감을 표상하는 비극적 존재임에 비해 이 작품의 ‘물속 하늘 나라 가는 백로’는 그리운 어머니로 재해석되어 조화와 지속성을 띤 존재로 변용된다. 물속 하늘 나라 가는 ‘백로’는 ‘신음’ ‘진통제라는 고통스러운 투병으로 돌아가신 고운 엄마’가 되어 손을 흔든다. 시인은 마침내 ‘물속’이라는 거울을 통해 ‘높아서 더 깊어지는 새의 길’과 ‘낮아서 더 넓어지는 물의 길’이란 심오한 모순 진리의 초월적인 성찰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박권숙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 무렵까지 우편(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우편번호 04513) 또는 e메일(won.minji@joongang.co.kr)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02-751-5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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