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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10월 수상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장원>

무료급식 행렬 
-이성보

눈 뜨면 적군처럼 밀려드는 고독감을
아군으로 막아줄 혈육소식 아예 없고
허기만 게릴라 되어 수시로 출현한다

저격탄 쏘아대듯 썰렁한 한데 바람에
저항할 기력 잃고 되똑하니 버려져서
노후를 포획당한 채 한 끼니를 얻는다

검버섯 낀 얼굴마다 매복한 걱정거리
진군하는 세월 두고 퇴각만을 거듭하다
서럽게 백기 내걸고 투항하는 저 행렬

◆이성보

이성보

이성보

1957년 부산 출생. 효원의료재단 근무. 수필을 쓰다가 몇 해 전부터 유명 시조 시인들의 작품집을 읽으며 시조 공부.

<차상>

성묘
-임주동

요즘도 날 궂으면 삭신 그리 쑤시나요
다 자랐을 손주들 많이 보고 싶으셨죠
내 얘기 듣기만 하고 한 말씀도 안 하신다.

등 굽은 소나무에 말벗을 당부하고
손짓하는 발걸음 그림자 흔들리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리움도 출렁인다.

감잎이 떨어지는 산길을 걸어 나와
햇살 한 짐 지고서 방안에 들어서니
당신이 먼저 오셔서 사진 속에 앉으셨다.

<차하> 

강구항
-박주은

날이 선 찬바람에 목도리 동여매고
폐부를 읽어 내는 노동의 저 밑바닥
질척한 발목을 당겨 모닥불에 녹인다

비릿한 고동소리 그물에 칭칭 감겨
꿈틀대는 대게 발 손으로 뜯다보면
왁자한 설익은 문장 파장으로 묻힌다

선창가 갈매기 아랫목에 불러놓고
여인숙 창문들이 바람에 덜컹일 때
어머닌 시간의 등뼈 자박자박 다독인다

<이달의 심사평>

이성보씨의 ‘무료급식 행렬’을 장원 작으로 뽑아 들었다. 무료급식 행렬을 소재로 한 시들은 이미 적지가 않고, 다시 써 봐도 기왕의 범주를 넘어서기 어렵다. 하지만 이 작품은 같은 소재를 전쟁 상황에 비유하여 신명 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느 시들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독특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와 같은 상황에 걸맞게 적군, 아군, 게릴라, 저격탄, 포획, 매복, 진군, 퇴각, 백기 등의 전쟁 용어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시어로는 거의 사용된 적이 없는 이와 같은 생경한 어휘들이 신기하게도 제 자리에 착착 들어앉아, 우울한 상황에 난데없는 신바람과 역동성을 부여한다. 한마디로 말하여 참신하고도 돌올한 상상력이 크게 돋보이는 작품이다.

차상으로는 임주동씨의 ‘성묘’를 뽑았다. 성묘를 가서 무덤 속의 남편과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작중 화자의 어조에서 참 애틋한 사랑이 느껴진다. 특히 “햇살 한 짐 지고서 방안에 들어서니/ 당신이 먼저 오셔서 사진 속에 앉으셨다”는 예상 밖의 마무리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방점을 찍게 했다. 차하로는 박주은씨의 ‘강구항’을 뽑았다. 작품이 전반적으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을 뿐만 아니라 시상 전개가 자연스럽고, 가락도 비교적 안정되어 있다.

권선혜, 박경미, 이기선, 조우리, 최종천씨의 작품들이 마지막까지 우열을 다투었다. 무난한 작품에 안주하지 말고 좀 더 치열하게 밀고 나가, 현실에 대한 구체적 인식, 독창적 표현, 개성적인 가락의 3박자를 제대로 갖춘 작품으로 다시 돌아오길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심사위원: 이종문·최영효(대표집필 이종문)

<초대시조>

포도나무 이발사의 꿈
-임성구

시를 일처럼 쓰는 시인이 있었네
포도나무 가지 치듯 모순된 말을 쳐내
따뜻한 운율 되려고 푸르게 일을 하네

허공으로 올라갈 사다리를 세워놓고
한 발짝씩 오르면서 혈맥을 압축하네
바닥에 뚝뚝 떨어진 시
바람장막 치고 있네

낱말처럼 번져가는 가지들의 푸른 맥박
진 꽃들의 화사한 기억, 찾아갈 수 있을까
한 송이 염원의 문장
노을로 익기까지

◆임성구

임성구

임성구

1967년 경남 창원 출생. 1994년 현대시조로 등단. 『오랜 시간 골목에 서 있었다』 『살구나무죽비』 『앵통하다 봄』, 현대시조 100인 시조선집 『형아』. 경남시조문학상, 성파시조문학상 수상. 현재 ‘서정과 현실’ 편집부장. 경상남도교육청 총무과 근무.

자고새에게 광기와 포도의 달이라는 가을, 여기 한 그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포도나무를 만난다. 여기 한 사람 세상에서 가장 힘겨운 포도나무 이발사를 만난다. 포도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과일나무로 성경에 155회나 나올 만큼 평화와 축복, 생명과 풍요의 상징으로 인식되어왔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시는 인생의 보편적 요소를 개연적이고 인과적 연결을 통해 재현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처럼 이 작품의 시인은 시를 포도나무로, 시인을 포도나무 이발사로 명명하여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시’라는 포도나무에서 한번 그 탐스러운 생명의 포도송이를 맛보고 한번 그 향기로운 영혼의 포도송이에 취해본 이는 누구나 허공으로 올라갈 사다리를 한 발짝씩 오르며 푸르게 일을 하는 ‘시인’이란 포도나무 이발사를 꿈꾼다. 무성한 가지를 치듯, 모순된 말을 쳐내고, 운율의 혈맥을 압축하고, 바닥에 뚝뚝 시를 떨어뜨린다. 그래서 마침내 낱말의 푸른 맥박이 찾아가는 잘 익은 한 송이 염원의 문장을 꿈꾼다. 한 발짝만 헛디뎌도 위태로운 사다리에서 추락하고 말 생명과 땀과 눈물을 담보로 시의 포도나무에 필생의 꿈을 건 포도나무 이발사의 사명감이 빛난다. 그 사명감으로 오늘 여기 우리 핏줄 속에 아름드리 고목으로 뿌리 내리고 우리 맥박으로 꽃피워내고 한국 고유의 맛과 향으로 잘 익어가는 자랑스러운 단 한 그루 ‘시조’라는 포도나무가 눈부시게 빛난다.

박권숙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 무렵까지 우편(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우편번호 04513) 또는 e메일(won.minji@joongang.co.kr)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02-751-5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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