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처구니없는 「정문논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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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협상에서 때로는 내용보다 형식이 더 강조될 때가 있다.
또 군자는 뒷골목 아닌 큰길만을 골라 걷고, 옛 양반은 뒷문이나 샛문으로는 드나들지 않는 고집도 있었다.
그러나 형식·체면에 집착한 나머지 실질적인 소득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바로 이런 일이 지하철 파업예고 27시간을 앞두고 서울시와 지하철공사노조가 막판 협상을 시도키 위해 만나기로 돼있던 서울시 청사 앞에서 벌어졌다.
정윤광 노조위원장을 포함, 13명의 노조대표들이 시청을 찾았다가 『정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협상 그 자체를 포기, 되돌아간 일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이 시청 앞에 도착한 것은 이날 밤 9시25분쯤. 약속시간인 9시에서 25분 정도 늦게 나타난 이들은 매일오후6시 시청업무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굳게 닫히는 정문 앞에서 『문을 열라』고 요구하다 서울시 측이 『옆문으로 들어 오라』고 하자 「자신들은 X가 아닌 사람」임을 내세워 이를 거절, 돌아가 버림으로써 1천만 시민의 군과 귀가 쏠린 이날의 협상노력은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서울시도 끝내 「정문을 열 수 없다」는 고집으로 막판노력을 포기했다.
결국 「정문」이라는 형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노사협상이 어차피 단순하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억지논리에 지루한 신경전을 펴기도 하고 짐짓 본질과는 상관없는 선문답을 하는 것도 협상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는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날 밤 시청 정문을 사이에 둔 신경전도 이런 맥락에서 웃어 넘길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문제는 이날 입씨름이 타결을 위한 신경전이 아니라 선전포고를 앞두고 명분 만들기에서 비롯된 계획된 해프닝일수도 있다는데 심각성이 있다. 분규의 불씨였던 합의각서가 타결되었음에도 「밀리면 끝장」이라는 절박감에 싸인 양측이 펼친 이날의 「정문 논쟁」은 어쩌면 강경 대결로 치닫겠다는 내심들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만든다.
그렇다면 유치한 「정문 논쟁」에 앞서 결국에 맞부닥칠 『왜? 지하철이…』라는 시민들의 분노에 찬 물음에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를 남은 몇 시간이라도 생각해 두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다.
이철호<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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