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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예멘 난민 탈출 경로 밟은 정우성 "난민, 거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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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아픔 속에 있는,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은 누군가다. 전쟁, 폭력, 살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는 누군가"

 “그들의 삶을 목격하고 직접 만나며 생각하게 된 ‘난민의 정의’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한 단어씩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지난 19~24일 ‘지부티-말레이시아-한국’의 루트를 밟으며 현지에서 그들의 얘기를 전해준 이는 바로 5년째 유엔 난민기구(UNHCR)의 친선대사로 활동 중인 배우 정우성(45)씨다.

정씨는 유엔 난민기구 한국대표부와 함께 한국으로 오는 예멘 난민들의 탈출 여정을 밟았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생소할 수 있는 아프리카 지부티는 올해 들어 제주도에 상륙한 예멘 난민들이 거쳐 온 주요 국가 중 하나다.

유엔 난민기구(UNHCR) 친선대사 배우 정우성(45)씨가 아프리카 지부티에 있는 마르카지 예멘 난민 캠프에 도착해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 유엔 난민기구 제공]

유엔 난민기구(UNHCR) 친선대사 배우 정우성(45)씨가 아프리카 지부티에 있는 마르카지 예멘 난민 캠프에 도착해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 유엔 난민기구 제공]

제주 예멘 난민들이 한국 사회에 던진 파문은 컸다. 남의 일인 줄 알았던 난민 문제가 우리의 문제로 다가오면서, 난민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이중적인 시각이 드러났다. 2015년 터키의 한 해안가에서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기 ‘아일란 크루디’가 차가운 시신이 돼 엎드린 채 발견됐을 때 한국 사회에는 ‘진심으로 가슴 아프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올 들어 제주도에 상륙한 561명의 예멘 난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제주도에 들어온 예멘 난민들을 추방해달라”는 국민 청원이 줄을 이었고 이는 ‘이슬람 공포증’으로 까지 이어졌다. 노인·어린아이·여성 등 전통적으로 생각하던 난민의 이미지와 다른, ‘비행기 표를 살 만한 경제적 여력이 있는, 스마트폰을 쓰는 젊은 남성’의 모습을 한 난민들은 배척의 대상이 됐다.

정씨는 이 문제의 중심에 있었다. 난민 문제에 대해 꾸준히 목소리를 냈고 그에 대한 비난도 뒤따랐다. 그는 이번 출장에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다. 하나는 난민들이 처한 상황을 알리는 것이고 하나는 제주 예멘 난민 문제에 대한 울림을 주기 위해서라고. “제가 직접 난민의 이동 루트를 따라다니면서 얘기하면 (예멘 난민에 대해 혐오감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좀 더 설득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오게 됐다”는 정씨에게 좀 더 자세한 얘기를 들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유엔 난민기구(UNHCR) 친선대사 배우 정우성(45)씨가 아프리카 지부티에 있는 마르카지 예멘 난민 캠프를 방문해 그곳에 있는 난민들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유엔 난민기구 제공]

유엔 난민기구(UNHCR) 친선대사 배우 정우성(45)씨가 아프리카 지부티에 있는 마르카지 예멘 난민 캠프를 방문해 그곳에 있는 난민들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유엔 난민기구 제공]

생존을 위해 한국까지 오려는 예멘 난민의 행로를 밟으며 느낀 바가 각별할 것 같다. 현장에서 그들의 여정과 그들의 삶을 접하며 느낀 바에 관해 설명해달라 
"지부티와 말레이시아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다 비슷하다. 개개인을 놓고 보면 어떤 부모나 다르지 않다. 자식들에 대한 걱정하고 가족들이 아팠을 때 받을 수 있는 의료 혜택 등에 대해 갈망하게 된다. 자식들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직업을 갖고자 하는 욕구도 당연히 있다. 돌아갈 수 없는 나라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고 내전의 장기화로 본인들이 머무는 곳의 열악함이 가중되는 것에 대한 힘듦도 있다. 난민으로 인정될 수 있는 제도가 갖춰져 있는 국가로 이동해서 여유 있는 직업을 가지려고 하는 ‘아버지로서의 책임감’ 등도 작용한다. 예멘 옆에 있는 지부티는 난민 인정은 어렵지 않게 해 주지만 나라 자체가 워낙 가난하다 보니 직업을 구하기가 힘들다. 말레이시아의 경우는 난민 자체를 인정해주는 제도가 없어 불법 취업을 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이런 불안함 때문에 제3국으로의 이동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왜 여기까지 왔어?’의 시각으로 그들을 대해 왔는데, 그것보다는 ‘무엇을 찾아 왔지?’라는 질문으로 그들을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엔 난민기구(UNHCR) 친선대사 배우 정우성(45)씨가 아프리카 지부티에 있는 예멘 난민 가족을 만나서 얘기하고있다. [사진 유엔 난민기구 제공]

유엔 난민기구(UNHCR) 친선대사 배우 정우성(45)씨가 아프리카 지부티에 있는 예멘 난민 가족을 만나서 얘기하고있다. [사진 유엔 난민기구 제공]

현지에서 진행한 페이스북 라이브에서 작고 젊은 나라 지부티가 난민에게 보여준 포용성과 선진적 인권 의식에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였다고 말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 
"1977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나라 지부티는 인구 97만의 작고 젊은 나라다. 그런데도 사람들 마음이 굉장히 열려있더라. 본인들 지역 사회가 넉넉하지 않더라도 없는 상황에서 ‘무엇을 나눠서 저들과 같이 삶을 이어갈 수 있을까’ 하며 고민하는 모습이 보였다. 지부티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정도 북쪽으로 가면 오복이라는 작은 항구 지역이 있는데 거기 ‘마르카지’라는 캠프가 있다. 오복 지역은 여름 기온이 50℃ 이상 올라가는 열악한 지역이다. 그곳에 시민 8000여명 살고 있었는데 여기에 난민 캠프촌 만들었다. 규모도 작고 주민들도 넉넉하지 않은 삶을 사는 지역이어서 정부 당국에서 이 캠프를 옮기려고 했다더라. 그런데 이 지역 사람들이 '옮기지 말아달라. 우리 함께 이 지역에 있는 것 나눠서 살 수 있다'고 말렸다고 하더라. 오히려 그렇게 화합을 하고 사니까 지역 경제도 조금 더 나아지며 발전한다고 들었다. 그 어떤 선진화된 나라보다 인간 존엄을 존중하는 모습이 순수하게 빛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엔 난민기구(UNHCR) 친선대사 배우 정우성(45)씨가 지난 20일 아프리카 지부티에 있는 마르카지 난민 캠프에 방문해 의료 센터를 둘러보고있다. [사진 유엔 난민기구 제공]

유엔 난민기구(UNHCR) 친선대사 배우 정우성(45)씨가 지난 20일 아프리카 지부티에 있는 마르카지 난민 캠프에 방문해 의료 센터를 둘러보고있다. [사진 유엔 난민기구 제공]

이번 출장 중 만난 난민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는지.
"사실 모든 사람이 기억에 남는다. 보통 사람들은 ‘난민=헐벗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진다. 그래야만 ‘저 사람은 진짜 난민이니까 우리가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난민은 거지가 아니다. 한 나라에서 우리와 똑같이 생활하던 누군가다. 그들 중 대학교수도 있고 공무원도 있고 은행가, 비즈니스맨, 컴퓨터 공학자 등 다양한 사람이 있다. 다만 나라에 전쟁이 나고 안전을 위협받기 때문에 그들이 챙겨 나올 수 있는 현금이나 재산을 들고 피신한 거다. 그게 장기화하면서 수중에 챙겨나온 재산은 바닥나고 직업도 구하기 힘들어졌는데 아이들은 자라고, 그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거나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은 없는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들이 난민이다. 우리도 6.25 전쟁 당시 피난 간 이들 중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있는 만큼 챙겨나갔다. 예멘에서도 똑같다. 멀리 갈 수 있는 사람들은 그만큼 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한여름 기온이 50℃ 이상 올라가는 지부티 마르카지 난민 캠프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더 여유 없는 사람들은 지금 예멘 안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고…."
‘제주 예민 난민’ 상황은 난민에 대한 한국 사회의 다소 이중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한국인 중 많은 이들 역시 6.25 전쟁 때 피난을 경험한 난민의 아들·딸들인데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고 보는지.
"6·25 때는 국내 실향민이 더 많았고 그 이전 제주 4.3이나 일제강점 때 식민지 수탈의 시대를 벗어나기 위해 카자흐스탄이나 동유럽, 북유럽까지 조선인들이 뻗어 나갔지 않나.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지금 예멘인이 한국에 온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재를 사는 우리는 너무 역사와 단절돼있다. 역사에 대한 아픔과 공감이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난민에 대해서도 ‘남의 얘긴데 뭐. 일제시대 때 우리의 특수한 상황은 지나간 얘기잖아’ 라는 식으로 단절시키려고 한다. 결국 이는 ‘난민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단순한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한국 사회가 어떤 역사 속에서 어떤 인성의 사람들을 길러내는지에 대한 얘기까지 깊이 있게 파고들어 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유엔 난민기구(UNHCR) 친선대사 배우 정우성(45)씨가 2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유엔난민기구 사무실을 방문했다. [사진 유엔 난민기구 제공]

유엔 난민기구(UNHCR) 친선대사 배우 정우성(45)씨가 2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유엔난민기구 사무실을 방문했다. [사진 유엔 난민기구 제공]

많은 사람이 난민에 대해 ‘그들이 들어와 범죄를 저지르고 일자리를 빼앗으며 우리의 터전을 위험하게 하면 어쩌냐’고 한다. 이 질문에 답을 한다면? 
"누군가가 난민 인정을 받아서 우리나라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우리나라 사법제도 안에서 강력한 처벌을 받으면 된다. 그것은 개인의 일탈이지 난민이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는 건 아니다. 개인의 일탈을 가지고 ‘난민’이라는 특정 신분을 부여받을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에 부닥쳐있는 집단 전체를 예비 범죄자 집단으로 보는 건 부당하다. ‘저들은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에 부닥쳐있으니까 대다수가 범죄를 저지를 거야’라고 치부하는 건 굉장히 반 인권적인 판단이다"
유엔 난민기구(UNHCR) 친선대사 배우 정우성(45)씨가 말레이시아에 있는 유엔 난민기구 사무실을 방문했다. [사진 유엔 난민기구 제공]

유엔 난민기구(UNHCR) 친선대사 배우 정우성(45)씨가 말레이시아에 있는 유엔 난민기구 사무실을 방문했다. [사진 유엔 난민기구 제공]

친선대사로 벌써 5년째 활동 중이다. ‘배우 정우성’과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 정우성’ 중 스스로 어느 쪽에 더 만족스러운지.
"(크게 웃으며) ‘두 분야에서 들이는 시간 만큼 잘 성숙하고 있지 않나…’ 하는 개인적인 소감이다"
2014년 명예대사 자격으로 처음 네팔 난민촌을 다녀온 후, 가기 전날을 떠올리며 “나 스스로 ‘너 정말 준비됐니? 무슨 생각으로 가는 거야? 잘할 수 있어?’라고 끝없이 물으며 두려움을 느꼈다”고 말했는데 지금은 어떤가. 이제 준비가 됐고, 더 잘할 자신이 있는지.
"예전에는 어렵기만 했다. ‘내가 이들을 대표해서 얘기할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도 있었고. 지금은 그들을 대신해 말하는 데 있어 조금은 자신감이 생긴 것 같다. 이번에 ‘지부티-말레이시아-한국’ 코스를 잡은 것도 제주 예멘 난민 이슈에 대해 좀 더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난민의 이동 루트를 따라다니면서 얘기하면 (예멘 난민에 대해 혐오감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좀 더 설득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막상 돌아가면 그들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는 말을 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예전 미션 때보다는 좀 더 자신감이 생긴 건 분명하다"

권유진 기자 kwen.y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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