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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스러움과 장률스러움, 그 같음과 다름에 대하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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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1호 30면

홍상수의 영화 ‘풀잎들’과 장률의 영화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언젠가부터 한국 영화계에 ‘홍상수스러움’이라는 말이 생겼다. 세상에서 갖가지 찌질함을 드러내는 남자들 혹은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거나, 특히 지식인들의 위악스럽고 속물스러움을 가득 드러내는 꼴을 조금이라도 보여주는 영화들은 죄 “홍상수 같다”는 얘기를 듣곤 한다.

홍상수의 영화는 요즘처럼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아예 동어반복을 특징으로 한다. 같은 얘기를, 인물과 배경을 약간씩만 손을 봐서는 계속해서 리와인드(re-wind)시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그게 꼭 그런 것도 아닌 것이, 홍상수는 궁극으로 하고싶은 덩어리의 얘기가 있는데 그게 예를 들어 한 스무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면 그 모두를 2시간 혹은 1시간으로 쪼개서 한 편씩 토해내고 있는 셈이다. 영화마다 흡사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건 바로 그 때문일 수 있다. 통으로 하나의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가 요즘 점점 짧아지는 것은 이제 한 묶음의 챕터 형 이야기가 끝을 맺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풀잎들'

'풀잎들'

그의 최신작 ‘풀잎들’은 홍상수의 사(私)소설적 취향이 이제 꼭짓점에 다다르고 있음을 감지하게 해준다. 그의 세계관은 의도적으로 점점 더 좁아지고 있으며, 그 작은 세상의 심연을 통해 세계를 이미 다 이해해 내고 있다는 달관의 경지를 선보인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게 터득과 통찰로 칭송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늙고 낡은, 소심함과 답답증으로 읽히기도 한다. 일명 ‘홍상수 월드’는 점점 소수의 문파(門派)로서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자신들만의 비법을 전수하고 나눠가며 한 시대의 전설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기는 해 보인다.

그런 ‘홍상수스러움’에 1차적으로 닮은 꼴 인물들을 선보이며 요즘 잇따라 영화를 내놓고 있는 감독이 바로 장률이다. 옌볜 조선족 출신인 장률 감독은 2005년 ‘망종’으로 세상에 알려질 즈음에는 두만강 주변에서 살아가는 조선족들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려 내는 데에 주력해 왔다. 그는 2014년 ‘경주’를 만들고 ‘필름시대의 사랑’과 ‘춘몽’을 만들면서 작품의 스타일을 전면적으로 바꾸게 되는 데, 사람들은 그의 그런 변화에 ‘홍상수 식’ 어법이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장률이 영화 만들기의 무대를 옌볜이 아닌 한국으로 바꾸면서 실제로 홍상수 영화에서 뭘 가져 왔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등장 인물마다 비겁하면서도 비틀려진 욕망의 한 가닥 씩을 부여 안고 게걸스레 쩔쩔 대는 모습은 홍상수의 ‘그들’과 비슷한 것은 사실이다.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률이 이번에 내놓은 신작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는 ‘홍상수스러움’을 뛰어넘은 것은 물론, 자신이 만든 전작의 많은 부분을 뛰어 넘어 새로운 극 지점을 향해 커다란 발자국을 남긴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한 마디로 ‘군산’은 장률의 최고 작이다.

평소 사모해 왔던 선배의 여자(문소리)가 이혼했다는 것을 알게 된 남자 주인공(박해일)이 그녀와 함께 어머니의 고향이라는 군산에 가서 며칠을 지내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그렸다. 군산에서 두 남녀는 각각 다른 남자(정진영)와 여자(박소담)에게 시선을 뺏기게 되는데 얘기가 뒤로 갈수록 이게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가 환상인지, 혹은 남자의 꿈인지를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아예 나중에는 이들이 군산을 진짜 갔다 온 것인지, 그렇다면 그 뒤는 어떤 결론이 나는 것인지도 알 수 없게 된다. 아니, 그딴 것이 아예 중요하지 않아지는데, 그건 어쩌면 ‘홍상수 식’의 스토리텔링 기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하지만 장률은 홍상수보다 보폭이 훨씬 크고 다르다. 조선족이지만 한국 혹은 북한과 중국의 경계에서 어쩔 수 없이 디아스포라로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장률은 공간을 확대함으로써 그 약점을 보완해 낸다. 그리고 오히려 코스모폴리탄적인 세계관을 흡수하고 방출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있어 전작 ‘경주’의 경주나, 이번 신작에서의 군산은 고도(古都)와 현대 도시, 이국(異國)과 본국(本國)의 차이를 교묘하게 통합시켜 나가는 공간이며 자신의 이방인적 성향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것’의 본질을 획득시켜 나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래서 장률의 공간은 훨씬 크고 개방적이다. 인물들의 동선이 홍상수보다 길고 넓은 것도 그 때문이다. 인물들이 쪼잔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심지어 배우 중 한 명인 정진영은 양쪽 영화에 모두 나온다), 그 인물들의 사회화가 홍상수와는 달리 훨씬 더 유연하게 진행된다.

홍상수와 장률은 처음에는 이음 동의어처럼 보이지만 이제 점차 이음 이의어로서 자기 영역을 확실하게 쌓고 있다. 어느 한 쪽의 우열함을 가리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하나의 유사했던 유전자가 확연하게 둘로 갈라져 새로운 생명들을 잉태해 내고 있다는 얘기다.

더 분명한 것 한 가지는 ‘풀잎들’이든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든, 홍상수든 장률이든, 가는 길과 방식은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지만, 어쨌던 세상의 진실에 직면하도록 사람들을 도와 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두 영화 모두 지금과 같은 시대에 실로 유용한 영화들임에 틀림 없다는 것이다. 이런 영화는 안 보는 사람들만 손해인 것이다. 사람들이 그걸 모른다. 안타까울 뿐이다.

글 오동진 영화평론가  사진 트리플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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