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 10. 뉴욕에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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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수련의 생활을 하던 미국 병원의 스태프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필자(서 있는 사람 중 오른쪽).

ECFMG(외국의대 졸업생 등록 교육위원회) 자격증 시험에 합격한 뒤 신청서를 제출했던 10여 곳의 병원으로부터 수련의 제의를 받았다. 나는 뉴욕에 있는 메리 이머큘리트병원(Mary Immaculate Hospital)을 택했다. 뉴욕이면 미국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세계의 수도'가 아닌가. 기왕이면 미국의 심장 깊숙이 뛰어들고 싶었다.

그런데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일이지만 당시엔 꽤나 심각했다. 1960년대 미국의 편의시설은 낙후된 우리나라와 비교할 수 없었다. 샤워기나 화장실은 물론이고 심지어 문고리까지 조작 방법이 달라 실수로 문이 안에서 잠겨 애를 먹었다는 얘기도 들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선진 문명을 접하면서 이런 실수를 할까봐 나는 친한 서울대 의대 동창 두 명과 함께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리고 방의 구조를 살펴보고 좌변기.샤워기.에어컨 등 편의시설의 사용법을 익히느라 밤을 꼬박 샜다.

64년 가을 미국으로 떠나기 전 병원에 들려 환자.직원들과 눈물의 이별을 했다. 그리고 김포공항에서 어머니와 언니.동료와 부둥켜안고 한동안 눈시울을 붉혔다. 당시 공항은 눈물로 환송하는 가족들로 무척 붐볐다. 유학이나 이민은 긴 이별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탄 뉴욕행 비행기는 하와이.시애틀을 경유해 꼬박 하루 만에 케네디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선 밍크코트를 걸친 사람, 반팔 옷을 입은 사람,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람 등 다양한 복장의 생경한 모습이 나를 반겼다. 병원으로 가던 그랜드 센트럴파크 길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 눈에 잡힌 풍광은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비포장도로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다니던 길에 익숙했던 나는 한없이 넓고 끝없이 펼쳐진 도로, 그 위를 씽씽 달리는 각양각색의 자동차를 보곤 아연실색했다.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30분 동안 실감한 것은 '아 이런 것이 하늘과 땅 차이라는 거구나'였다.

병원은 나를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규모는 400병상으로 크진 않았지만 의료시설은 입이 딱 벌어질 정도였다. 한국에선 보기도, 구하기도 힘든 각종 의료기기와 장비가 즐비했다. 한 번 쓰고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거즈.주사기.주삿바늘 등 의료소모품도 나를 '경악'하게 했다.

당시 우리나라 개인 병.의원 중엔 미군부대에서 보따리 상인을 통해 흘러나오는 주사기를 사용하는 곳이 많았다. 몇 번 소독해 사용하다가 주사기 끝이 무뎌지면 숫돌에 갈아 썼다. 몽당연필처럼 길이가 짧아지면 근육주사용을 정맥주사용으로 활용했다. 수술용 장갑에 구멍이 나면 덧붙여 다시 사용하기도 했다.

게다가 환자들은 어떤가. 참고 견디다 응급상황이 돼서야 병원에 달려왔다. 하지만 미국은 암 검사, 대사이상 검사 등 예방차원의 진료가 이미 보편화돼 있었다. 이런 의료 수준의 격차와 고국의 환자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가슴속에서 뜨겁게 응어리지는 그 무엇인가를 참아내야 했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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