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파 범」재판에 폭발물 검색 "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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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담당재판장인 정상학 부장판사는 공판에 앞서 6일 오후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공소장을 검토하는 등 재판진행 계획을 세웠으며 7일 아침에도 평소보다 이른 오전8시20분쯤 출근, 법정 안팎의 경비상황 등을 최종 점검.
정 부장판사는『재판준비 과정에서 무엇보다 고민스러웠던 것은 법조 기자단이 낸 법정 내에서의 사진촬영 허가신청을 허가할 것인지 여부였다』며『결국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돼 법정 내 촬영을 허가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법조 기자단은 6일 오후『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기록이라는 의미가 있는 데다 항간의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도 법정 내 사진촬영이 허가돼야 한다』며 담당재판부에 7년만의 사진촬영 허가신청을 냈었다.
이날 낮 12시쯤 오전 공판이 끝나 김 피고인이 변호인과 안기부소속 여자안내원 2명 등의 호위를 받으며 피고인 출입문을 통해 법정을 빠져나가자 법정 안에 있던 KAL기 폭파 희생자 유족 10여명이『판사와 검사·변호사가 모두 한통속이 돼 재판을 진행한다』며 재판진행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
유족들은『검사가 직접신문에서 김의 죄를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김을 변호하는 것 같다』는 등의 항의와 함께 울음을 터뜨려 주위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기도.
유족들의 이 같은 불평은 검사가 68페이지 짜리 김의 공소장을 토대로 신문하는데 다 김이 공소사실 모두를『예』라며 시인하자『검사와 피고인이 짜고 재판한다』고 생각했기 때문.
김 피고인은 검찰직접 신문에서 87년 10월 동북리 초대 소에서 이 모 부장으로부터『이번 동무들이 수행해야 할 임무는 남조선 비행기를 제끼는 것이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대답했다.
김 피고인은 이어 이상형 검사가『「제끼는」이란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비행기를 폭파하는 것』이라고 대답, 남-북한의 언어가 심한 차이가 있음을 입증.
대법정 주변은 이날 새벽부터 경찰 10개 중대병력 1천5백 여명이 배치돼 3중 차단벽을 쌓는 등 긴장감.
법정 안은 폭발물 은닉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 1차로 안기부 직원들이 보안점검을 마친데 이어 공판 당일인 7일에는 법원 직원들이 다시 최종점검을 하는 등 공판내용보다 보안에 더욱 신경을 쓴 듯 한 인상.
법원 측은 이날 새벽부터 법정 밖으로 통하는 모든 문을 봉쇄한 채 방청권을 갖고 입정하는 사람도 소지품을 일일이 검사하고 다시 금속탐지기로 검색한 뒤 입정시켰고 법정 안의 보안은 안기부직원과 검찰수사관·경찰관 등 이 합동으로 맡았다.
대한항공 858기 탑승 희생자 유족회원 및 민가협회원 등 50여명은 김현희의 1차 공판이 열린 7일 오전9시30분부터 법원구내 서울형사지법 건물 앞에서「희생자의 유해와 추락비행기의 잔해 등 재 수색」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87년 11월29일=KAL 858기 폭파
▲87년 12월1일=바레인 경찰, 범인 검거
▲87년 12월15일=바레인 측으로부터 신병인도
▲87년 12월18일=KAL기 1차 잔해 검증
▲87년 12월19일=김승일 사체 부검
▲87년 12월23일=김현희 입건
▲88년 1월15일=안기부, 수사결과 발표
▲88년 11월25일=서울지검 송치
▲88년 12월2일∼89년 1월31일=김현희 6회 조사, 유족대표·폭발물전문가·정부사고조사반원·대한항공직원·외무부 직원 등 조사, 88년 1월 추가 수거한 잔해압수, 미얀마 정부·외무부·대한항공간 잔해 인수인계 서류 및 미얀마 정부 사고조사 보고서 입수
▲89년 2월 3일=김현희 기소
▲89년 3월 7일=1차 공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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