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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상연의 시시각각

일모도원(日暮途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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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상연
최상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어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프랑스에선 정부기관에 매달리고, 영국에선 자치 영주에게 호소하지만 미국인들은 결사체를 조직한다고 토크빌은 저서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적었다. 1831년 미국을 방문한 뒤였다. 그가 만약 지금 서울을 찾았다면 틀림없이 광화문 집회를 꼽았을 것 같다.

내 편 겁박·억지에 회초리 안 들면 #‘이게 나라냐’만 무한정 반복될 뿐

대규모 시위가 부쩍 늘어난 게 이 정부의 특징이다. 꼭 촛불이나 태극기 집회만도 아니다. 난민 수용을 놓고 찬반 집회가 인근에서 동시에 열리는가 하면 개 식용에 반대하는 동물보호단체에 맞서 ‘개보다 사람이 우선’이라고 육견협회가 맞서는 식이다.

그래도 민주노총과 전교조 집회가 여전히 압도적인 1, 2등이다. 자신들의 이익 챙기기를 촛불 민심으로 둔갑시켜 들이미는 새 사업이 있고, 억지 청구서도 많다. 오죽하면 ‘민주노총과 전교조는 더 이상 사회적 약자가 아니다. 책임을 다해 달라’는 대통령 비서실장과 여당 원내대표의 발언까지 나왔을까.

훌륭한 말이다. 아무리 내 편이라도 막가파식 불법과 횡포엔 어물쩍 넘어가지 않고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는 뜻으로 들린다. 사사건건 감싸고 돌며 ‘촛불 지분’ 요구에 설설 기는 모습이 아니다. 중요한 건 생각과 행동도 정말 그러냐는 거다.

지난 주말 민주노총은 세종대로 전 차로를 막고 ‘실력’을 보여줬다. 이번 주엔 대검 청사를 점거했고, 다음 주엔 총파업이다. 그런데 주된 이유란 게 탄력근로제 확대 규탄이란다. 여·야·정 합의사항에다 미·일·독·불이 모두 시행 중이지만 깔아뭉개겠단 뜻이다.

노동계 입장에선 안 되는 게 없는 정권이다. 쌍용차 해고자를 복직시켰고, 각종 정부 산하기관 요직엔 전·현직 간부가 자리를 챙겼다. 큰 폭의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도입은 나라 경제에 큰 짐이 된 상황이다. 그래도 그 정도론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엊그제는 난장판이 된 법정도 있었다. ‘맥아더 동상 철거 집회’를 매년 열고, 북한 대남혁명노선에 가세한 혐의로 기소된 재판에서 피고인 측은 ‘이런 재판에 분노를 느낀다. 법원은 부끄러운 줄 알라’고 퍼붓다가 ‘동상에 불을 붙여도 처벌받진 않았다’고 주장했다.

따져보니 그랬다. 지난달 반미 성향 단체 회원들이 맥아더 동상에 불을 지르고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했지만 경찰은 불구속기소했다. 그저 미(未)신고 집회 개최 혐의다. 서울 한복판에서 김정은 연호가 이어지고 미 대사관 앞에선 대형 성조기를 찢고 난리쳐도 정부는 우려하는 논평 한 줄이 없다.

여권에선 회초리는커녕 ‘강한 압박은 위험하다’는 이야기가 오히려 많다. 그러니 이들의 상전 노릇을 경찰은 ‘알아서 모시는’ 모양새고, 대검 직원들은 후문으로 퇴근한다. 왜 그런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촛불 세상이다.

그렇지 않아도 ‘갈등 공화국’으로 불리는 나라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게 으뜸 원인이다. 한국인 셋 중 한 사람이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집단으로 ‘정치적 관점이 다른 집단’을 꼽는다. 지지층만 챙기는 분노 정치가 증오를 낳고 대결의 악순환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끝낼 때가 됐다. 청와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민주노총이 막강한 조직과 자금으로 촛불시위를 주도한 건 맞다. 하지만 그건 특권층의 반칙과 억지 앞에 ‘이게 나라냐’고 맞섰던 용기가 국민들에게 먹혔기 때문이다. 자기들 반칙과 억지도 마찬가지다.

“국민에 대해 희생을 요구하는 지도자가 나올 수 없는 게 이 시대의 근원적 위기”라고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말했다. 희생을 요구하는 정치란 미래 비전을 지닌 지도자만이 가능해서다. 지지층에 쩔쩔매는 우리 정치가 바로 그렇다. 가뜩이나 길은 먼데 날은 어둑해지고 찬바람까지 크게 일어난 대한민국 경제고 안보다.

최상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