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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피하다 추락할까 겁나"…무용지물된 탈출 수단 '완강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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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9일 새벽 서울 종로구 관수동의 고시원에 화재가 발생해 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고시원에는 완강기가 설치되어 있지만 이를 제대로 사용한 시민은 확인지 않고 있다. 최정동 기자

9일 새벽 서울 종로구 관수동의 고시원에 화재가 발생해 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고시원에는 완강기가 설치되어 있지만 이를 제대로 사용한 시민은 확인지 않고 있다. 최정동 기자

경기도 한 기숙형 사립고등학교에서 생활하는 박모(17)군은 서울 종로 고시원 화재 사고에서 완강기를 사용하지 못한 사상자를 보며 학교 화재 대피 훈련을 떠올렸다.

화재난 종로 고시원, 완강기가 유일 탈출수단 #"있는 줄도 모르고, 사용 방법도 몰랐을 것" #

박군은 "300명의 학생들이 화재 훈련 때마다 피난 계단만 이용한다"며 "방에 있는 완강기를 사용한 탈출 훈련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계단이 막히면 완강기로 도망쳐야 하는데 사용할 줄 아는 친구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9일, 스프링쿨러도 없고 비상탈출구도 불에 막혔던 고시원 화재 현장의 남은 탈출 수단은 완강기 뿐이었다. 완강기는 지지대와 줄, 도르래 등으로 구성된 고층건물 탈출 수단이다. 서울 소방재난본부 관계자는 "완강기를 사용해 탈출한 시민은 아직 확인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했다. 종로소방서 관계자도 "고시원에는 대부분의 일용직 노동자들이 머물렀는데 완강기가 설치된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라고 했다.

2017년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 유족대책본부가 공개했던 2층 여자 목욕탕 내부 사진. 고장난 창문 탓에 완강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다.[유족대책본부 제공]

2017년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 유족대책본부가 공개했던 2층 여자 목욕탕 내부 사진. 고장난 창문 탓에 완강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다.[유족대책본부 제공]

2015년 13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경기도 의정부 아파트 화재 사고에서 완강기를 사용해 탈출한 시민은 단 한 명이었다. 지난해 제천스포츠센터 화재 때는 완강기가 설치된 창문이 열리지 않아 희생자가 늘어났다. 같은 해 아파트 8층에서 완강기로 내려오던 60대 여성은 로프를 지지대에 고정하지 않아 추락사했다.

3층 원룸에서 5년간 거주했던 장동엽(25)씨는 "원룸에 완강기가 있었고 사용설명도 읽어봤지만 실제 위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사용할 자신은 없다"고 말했다.

법률상 3층 이상 10층 이하 공동주택과 유흥주점 등 다중이용시설, 숙박시설에는 완강기 등 피난 기구가 의무적으로 설치돼야 한다. 설치는 의무지만 이를 제대로 사용하도록 하는 교육 여건은 미비한 상태다. 완강기 등 피난도구 사용법 교육을 받으려면 안전체험교실이 설치된 일부 소방서를 찾아가거나 설명서와 인터넷으로 독학을 해야 한다.

서울 영등포구에 거주하는 송모씨(29)는 "원룸에 설치된 완강기를 보며 제대로 사용법을 알려고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수도권의 한 소방관은 "일용직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다른 시민들 중에서도 완강기가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분들을 거의 없을 것"이라 말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관련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지난달 '완강기 사용 교육 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간단한 사용법은 완강기에 부착되어 있지만 사용 교육은 희망자에 한해서만 이뤄지는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권익위 권고에 따라 교육부에선 완강기 교육을 학생안전교육표준안에 포함시켰고, 소방청도 화재 국민행동요령 매뉴얼에 완강기 사용법을 추가했다.

권익위 관계자는 "완강기 사용법에 대한 학생들의 교육 여건은 상당 부분 개선됐으나 여전히 일반인의 완강기 교육 문제는 해결책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창우 숭실사이버대 소방 방재학과 교수는 "내 삶은 내가 챙긴다는 마음으로 시민들 스스로가 직접 완강기 등 화재 발생 시 대피 요령을 공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소병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화재시 완강기 사용과 관련한 문제들은 행안위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됐던 문제"라며 "고질적인 후진국형 화재 피해의 원인을 해결할 보완 입법을 모색 중에 있다"고 말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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