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 청사진」제시 급하다-문병호<사회부 차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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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마침내 농촌이「반란」을 일으켰다. 87년 가을부터 일부 농민단체를 중심으로 시작된 수세 거부 운동과 지난해 가을 이후 전국에 번진 고추재배 농민들의 집단 시위는 올 들어 왕조시절의「민란」을 연상케 할 정도로 확산, 격화됐다.
지난 연말 전남 무안 농민들의 군정점거 사건, 지난 달 13일 충북 영동농민들의 군수실 점거사건에 이어 13일 여의도에서 있은 해방이후 최대의 농민집회는 마치 농민 봉기의 양상이었다.
무안 군청 점거 때는 군청 업무가 마비돼 군은 사무실을 임시로 옮겨 일을 보았고 영동에서는 죽창을 든 농민들이 군수를 폭행하고 무릎 꿇리는 충격적인 사태가 있었다.
여의도 시위 때도 예의 죽창이 등장했으며『우리는 동학군의 후예』라는 구호와 함께 일부에서는 현정권의 퇴진을 외치기도 했다.
국회 의사당이 바라다 보이는 서울 복판 여의도 광장에 1만명이 넘는 농민들이 전국에서 몰러들어 손에손에 죽창을 들고 분노의 함성을 질러대는 일찌기 없었던 광경에 정치권은 물론 각 계층의 국민들도 큰 충격을 받은 듯 하다.
1차적인 반응은 그 폭력 양상에 대한 거부감과 경계로 나타났다.
시위가 있은 다음날 대통령이 예정에 없던 치안본부 순시를 하고 공권력 확립을 위한 엄정 대처를 지시하면서 비상이 걸린 경찰과 검찰은 주동자 색출·배후 규명에 연일 법석이다.
시민들의 대체적 여론도 이유와 명분이 어떻든「폭력」에는 심한 우려와 반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겉으로 나타난 표면적 현상에 대한 이같은 대응만으로 사태의 처리가 끝날 수는 없다.
농민들의 「봉기」는 일시적 불만의 표출이 아니라 그동안 수출수도 경제개발 정책 아래서 희생을 강요 당해온 농촌과 농민문제의 구조적 모순이 한계점에서 폭발한 것으로 보아야 옳기 때문이다. 당장 여의도 행사를 주도했던 관련 단체들은 여의도 집회가 폭력화한데 대한 사과와 함께 노 대통령의 취임1주년인 25일 전국에서 같은 명목의 항의집회를 갖겠다고 반발하고 있다.
한계에 달한 농민들의 분노앞에「민선 대통령」의 권위조차 자칫 흔들릴 판이다.
정부는 사태 후 몇 가지 대책을 내놓고 있다. 수세 일부 감면, 농개조 운영개선 등 자잘한 「개선」안이다. 수세의 폐지나 농개조의 해체, 고추전량 수매 등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에 변화가 없다.
그러나 이같은 눈앞의 지엽적인 개선만으로 오늘의 농촌과 농민문제를 풀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취약한 생산기반 아래 소농 중심의 영세 경영, 유통구조의 난맥 속에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가격폭등·폭락 파동, 생산비 증가를 못 따르는 농산물가격에 악화되는 채산성, 그에 따라 늘어만 가는 부채, 문화·의료·교육 등 제반복지로부터의 소외, 계속되는 이농 현상으로 말미암은 인력난과 혼령기 청년들의 결혼난…. 현재 우리 농촌의 상황은 한마디로「내일이 없는 망각지대」라고 할 수 있다. 60년대이래 산업화를 위해 농업과 농민을 희생시킨 시책의 필연적인 결과다.
물론 정부는 그동안 새마을 운동을 필두로 농촌에 적지 않은 투자를 했다. 그러나 그같은 투자는「싼값에 주곡을 공급」하는데 맞춰졌을 뿐 산업화과정에서 농촌과 농민의 위치를 정당하게 보장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새마을 운동의 결과 농가부채가 늘어난 역설적 상황은 그 상징적 사례다.
특히 80년대 이후 거세진 통상 압력속에 농산물 수입규제 장벽이 헐려 가면서 지금 우리농촌은 공황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과연 무슨 농사를 어떻게 지어야 할 것인가. 더 이상 농촌에 남아 농사를 짓는 것이 내 자식의 장래와 가족들의 행복에 과연 도움이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의도의 절규는 바로 이같은 우리 농업의 구조적 위기에 대한 농민들의 절망감의 표현이며 호소의 몸부림이다.
정부는 아니, 우리 사회는 농민들의 이같은 항변과 요구에 이제 정직하게 응답해야 한다.
과연 국민 경제안에서 농업을 어느 위치에 놓을 것인가. 그에 따라 농민의 응어리를 풀어줄 종합적인 시책이 정부의 이름으로 농민들에게 제시되어야 한다.
현재 우리 나라 전체 국민 중 농촌 인구는 7백77만명으로 약20%를 차지한다. 적어도 그 몫만큼은 그들에게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지금까지의 농업 정책이 그러했듯이 소수의 정책입안자들끼리의 탁상 논의로 20%국민들의 사활이 걸린 시책이 결정되어서는 안되며 농민들의 참여 하에 국민적 합의의 형태로 결정이 내러져야 할 것이다.
어느 나라도 농업을 단순한 비교 우위의 개념으로 다루는 나라는 없다. 농업은 그 화폐 경제적 생사성과 와는 무관하게 민족 공동체의 영원한 삶의 기반이며 그 담당자인 농민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아야 마땅하다. 전문가들은 정책에 따라서는 우리 농업이 충분히 국제경쟁이 가능하다고 밝히고 있다.
경찰이 여의도 시위 수사에 열을 올리고 있는 17일에도 전민련은 춘성의 40대 농부가 소 값 파동으로 진 빚 2천3백여만원 때문에 고민하다 10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했다. 더 늦기 전에 정부는 「희망이 있는 내일의 농촌」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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