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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페일린의 비건, 트럼프의 비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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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TV 영화 ‘게임체인지’에는 스티븐 비건 대북특별대표가 나온다. 물론 배우(스펜서 가렛)가 비건의 대역이다. 살짝 등장하는 것까지 합하면 총 네 번 나온다. 2008년 대선에서 세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를 부통령 후보로 영입한 공화당 매케인 후보 캠프의 막전막후를 다룬 실화다. 반짝 인기를 얻는가 했더니 갈수록 ‘외교 바보’임이 드러나는 페일린. 이때 등장하는 게 비건이다. 페일린의 ‘외교 과외선생’이 바로 비건이었던 게다. 몇 달 전 한 번 봤던 이 영화를 다시 틀어본 이유는 지난주 카메라에 잡힌 비건의 지도가 떠올라서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을 만나러 외교부 청사로 들어가던 비건의 손에는 상세한 지명이 적힌 한반도 지도가 들려 있었다. 비건은 영화에서도 페일린에게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꼼꼼히 국제정세를 설명한다. 하지만 페일린은 ‘화려한 이벤트’와 ‘이미지’만 원한다. 변칙으로 하려 한다. 비건은 고뇌한다. 가르치고 또 가르친다.

외교 가정교사로 ‘퍼포먼스’ 위험 목도 #트럼프 정권 ‘원칙 외교’ 구원투수될까

비건의 ‘지도’는 두 가지를 상징한다. 미 공화당을 대표하는 외교 프로페셔널이란 자부심, 그리고 원칙론이다. 10년의 세월이 지났고, 페일린에서 트럼프 대통령으로 ‘고용인’이 바뀌었지만 이 두 가지는 변하질 않았다. 실제 만나본 그의 이미지는 강렬했다.

오늘 미 중간선거 결과가 나온다. 이번 주 후반에는 폼페이오-김영철의 뉴욕 회동이다. ‘북·미 협상 제2막’의 시작이다.

현재로선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해도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는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민주당도 외교적 해결을 주장하고 있다는 근거에서다. 맞다. 기조는 변하지 않을 수 있다. 정책 주도권도 행정부에 있다.

하지만 피상적 분석이다. 민주당의 파상 공세는 기조 변화보다 더 큰 ‘상황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 그동안 잔뜩 움츠렸던 민주당은 2020년 정권 탈환을 향해 모든 걸 할 채비다. 하원의 모든 위원회를 장악한 민주당은 당장 폼페이오를 사사건건 외교위원회 청문회에 불러들일 것이다. 북·미 협상 경과, 검증 내용을 꼬치꼬치 캐묻고 제동을 걸 것이다. 군사위에선 매티스 국방장관을 불러 “한·미 연합훈련을 언제 재개할 것이냐”를 따질 것이다. 법안 통과와 예산 투입은 꽁꽁 묶인다. 가장 현실적인 변화로 북·미 협상에 북한 인권 문제가 올라갈 공산이 커졌다. 민주당과 미 여론이 이미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북한은 발끈하고, 협상은 진퇴양난이 될 수밖에 없다.

국내 정치 입지가 좁아진 트럼프는 외교에서 활로를 찾으려 할 테지만 높아진 의회의 벽, 원칙론으로 무장한 미 정통 관료의 저항을 넘어서기 쉽지 않다. 트럼프도 마뜩잖은 북한 문제보다 중국이나 중동 문제로 시선을 돌릴 수 있다. 이번 주 뉴욕에 오는 김영철이 ‘담대한 비핵화 선물’을 갖고 와야만 하는 이유다. 어쭙잖게 ‘제재 완화’ 운운하다간 판이 깨질 수도 있다. 솔직히 이미 다소 늦은 감도 있다.

‘퍼포먼스 정치’ ‘무뇌 외교’의 폐해와 위험을 페일린 곁에서 목격했던 비건.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하는 참모들에 매케인은 ‘게임체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라고 이럴 줄 알았겠느냐.” 그 회한이 “결코 북한이 비핵화할 때까지 대북제재를 완화하지 않는다. 최선희도 그걸 알고 나오라”고 했다는 비건의 강한 ‘원칙 외교’의 자양분이 됐는지 모른다.

하지만 “병진 노선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북한의 협박 외교, 이선권의 오만불손에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엄청난 환대를 훼손할 정도는 아니다”고 하는 청와대의 한심한 외교에 비하면 비건의 주장이 훨씬 믿음직하고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