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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청와대 ‘입맛 뉴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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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이승만 대통령 시절, 서슬 퍼렇던 곽영주 경무대 경찰서장(지금의 대통령 경호실장)이 경계한 인물이 있었다. 대통령의 양복을 짓던 재봉원 서상국씨다. 곽 서장이 쌓은 민심, 정보 차단 장벽을 서씨가 가끔 허물었다. 이런 식이었다. 하루는 이 대통령이 서씨를 경무대로 불러서는 양복감을 만져 보며 물었다. “요즘 국산 나일론은 어떤가.” “국산 나일론 양복감은 없습니다. 양말 정도나 만들지요.” 그러자 이 대통령이 곽 서장을 보고 말했다. “나일론 옷감이 많이 생산된다고 보고하지 않았나. 공장 짓겠다는 기업가에게 500만 달러 융자까지 해줬는데 어찌 된 일인가.” 허위 보고가 들통난 순간이었다.

“세금이 많다고들 아우성”이라는 말을 이 대통령이 들은 것도 서씨를 통해서였다.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라”고 서씨를 겁박했던 곽 서장은 결국 서씨의 경무대 출입을 막았다. 대통령의 이발사들은 곽 서장의 요구대로 무슨 질문에든 그저 “다 잘 돼 갑니다”고만 답했다. 그렇게 이 대통령은 현실과 민심에서 멀어졌다.

지금이야 이 비슷한 일이 벌어질 리 만무할 터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이 가끔 현실과 동떨어진 발언을 하는 건 왜일까.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 “긍정적 효과가 90%”라고 하고, 고용 참사 속에서 “전체적으로 보면 고용의 양과 질이 개선됐다”고 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그제도 그랬다. 문 대통령은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 첫 회의에서 새만금과 관련해 “다른 지역도 태양광을 하고 싶어 할까 봐 걱정했다”고 말했다. 새만금에 태양광 발전소를 짓겠다고 하면 “우리도”라는 요구가 각지에서 터졌을 것으로 생각했다는 얘기다. 강원도 고성·양양, 충북 단양·충주, 충남 아산·천안, 전북 완주, 전남 고흥·보성, 경북 경주, 경남 밀양·하동 등 전국 곳곳에서 태양광 설치 반대 시위가 벌어진 일은 대통령 귀에 들어가지 않은 것인가. 기분이 찜찜하다. 보좌진에서 입맛에 맞는 뉴스만 거르고 가공해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 아닌가 하는, 발칙한(?) 상상마저 든다.

이러다가는 ‘입맛 뉴스’라는 신조어가 나돌까 두렵다. 그래서 바란다. 대통령이 수시로 국민을 만나 직접 민심과 현실을 파악하기를 말이다. 조선 시대 영조는 관청에 상소한 상인들을 불러 몸소 얘기를 들었다. “문제를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며 호조판서 등 대신들을 파직하기도 했다. 왕정 때도 나라를 바로 운영하기 위해 국왕이 그렇게 나섰는데, 21세기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현실을 모른다”는 소리를 들어서는 곤란하다.

권혁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