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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영혼 없는 관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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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

이 글은 먼 나라, 그러니까 영국의 고위 관료 얘기다. 제러미 헤이우드 경, 그의 이름이다.

2012년 봄 행동경제학을 원용할 정부기구를 만들지 논의하는 일종의 차관회의가 열렸다. 관료 최고위직인 ‘내각 사무총장’, 바로 그가 소집한 회의였다. 당시 배석자는 그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오른팔이다. 토니 블레어 총리 때부터 중용된 궁극의 정책통(policy wonk)이다. 디테일과 전략에 통달해 총리들에겐 필수적 인물이다.”

실제로 노동당 출신인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 13년 만에 집권한 보수당의 캐머런과 테리사 메이 현 총리 모두 그를 아꼈다. 한국적 상식으론 불가능한 이력이었다.

최근 이유로 짐작할 만한 대목을 들었다. 이달 초 56세의 나이로 숨진 그를 기리는 아내의 글을 통해서다. 그는 지난해 6월 폐암 진단을 받고도 1년여 더 일했었다.

“그는 네 명의 총리와 두 명의 재무장관과 가까이 일한 걸 대단한 영예로 여겼다. 그들이 각자의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돕는 데 흔들림 없이 최선을 다했다. 정치인과 공무원 사이 경계를 존중하면서도 공무원들이 장관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필요가 있다는 걸 늘 의식했다. 뜻이 다른 이들을 함께하게 할 더 낫고 새로운 길, 그리고 방법론이 있다고도 믿었다.”

사실 그게 관료직의 요체다. 선출직 리더십이 누구든 그 목표를 달성하도록 돕는 것 말이다. 막스 베버는 “관료의 명예는 그의 상급자가 그가 보기엔 잘못된 명령을 그의 이의 제기에도 불구하고 고수할 경우 이 명령이 마치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듯이 성심을 다해 수행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말한 일도 있다. 목표와 책임은 정치 리더십, 디테일과 집행은 관료의 몫이란 의미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영혼 없는 공무원’의 유래다.

최근 개각설이 도는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와 달라진 게 뭐냐”고 참모들을 질책했다는 소리가 들린다. 원래 “이래라저래라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해리 트루먼)는 게 대통령직의 숙명이다. 문 대통령은 그런데 능력이 아닌 친소·이념에 따라 사람을 좁게 썼고 과거 정권의 뜻을 이행했다는 이유로 말단 과장까지 멀리했다. 일이 굴러갈 리가 만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문 대통령과 ‘같은 편’(우석훈)에서도 이제 “충성심 대신 일 잘하는 사람 시키라”는 조언이 나온다는 점이다. 동의한다. 일 할 줄 아는 사람이 일은 한다. 널리 써라. 그게 지난해와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출발이 될 터이다.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