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쪽 공' 투수와 타자의 기 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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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위협(intimidation)이야. 그건 투수가 갖고 있는 권리이기도 해. 반칙은 절대 아냐. 랜디 존슨, 로저 클레멘스 등 훌륭한 투수들은 그 부분을 잘 이용하지. 시속 150㎞로 날아오는 공에 겁먹지 않는 사람은 없어. 그렇다고 맞히겠다는 의도는 아니야. 자세를 흐트러뜨려 바깥쪽 낮은 공을 던지기 위함이지. 타자가 물러서 주면 투수의 의도대로 되는 거지. 그런데 이승엽은 물러서지 않는군."

그랬다. 이승엽은 몸쪽 공에 물러서지 않았고 두 번째 타석에서 통쾌한 2점 홈런을 때려냈다. 콕스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에서 이승엽의 활약 이후 메이저리그에서도 이승엽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그때 이승엽의 약점으로 지적된 부분이 몸쪽 높은 공, 그리고 몸쪽 공에 이은 바깥쪽 승부였다. 지금 보니 본인도 그 부분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준비할 줄 아는 선수라면 앞으로 더 잘할 수 있다"며 이승엽을 좋게 평가했다. 줄곧 몸쪽 공을 던져대는 일본 투수들과 그 공에 '맞더라도 물러서면 진다'는 의지로 맞서는 이승엽. 지금 이승엽은 몸을 사리지 않는 굳은 의지로 뛰고 있다.

2002년 7월 말 이종범(KIA)의 경우가 생각난다. 그때 이종범은 롯데 김장현의 공에 맞아 광대뼈를 크게 다쳤다. 이후 이종범은 8월 말 복귀하면서 '검투사 헬멧'으로 불리는 특수헬멧을 쓰고 나왔다. 몸쪽 공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그 헬멧은 오히려 두려움을 키웠다. 타석에서의 태도는 오히려 위축됐다. 헬멧을 벗는 게 오히려 두려움을 없애는 길이었다. 이종범은 2005년 시즌을 시작하면서 평범한 헬멧으로 바꿨다. 그리고 몸쪽 공의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그때 비로소 이종범은 적극적이 될 수 있었다.

투수와 타자의 몸쪽 공싸움. 위협구는 반칙이 아니다. 그러나 빈볼은 반칙이다. 그 구분은 투수만이 안다. 타자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맞은 뒤 달려들어 다시는 그런 공을 던지지 못하게 혼을 내주는 것뿐이다. 분명한 건 있다. 투수의 의도대로 뒷걸음질치면 제대로 된 타격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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