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이 문제해결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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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고추 전량 수매와 수세 폐지를 요구하며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벌인 1만여 농민들의 격렬 시위는 한마디로 무법천지를 방불케 했다. 화염병과 돌멩이가 난무하고 죽창과 몽둥이를 든 흥분한 농민들이 건물과 차량을 닥치는 대로 불지르는 장면은 광란의 극이었다.
무차별 파괴와 방화, 심지어 행인들에게까지 폭력을 휘두른 과격성은 그 동기와 주작의 정당성마저 흐리게 하는 탈선이 아닐 수 없다. 다중이라는 힘을 빈 폭력은 방종이고 무질서의 전형이다. 평화적인 시위로 고추 수매와 수세 폐지를 요구하면 그만이지 건물과 길가에 세워둔 차량이 무슨 곡절과 관계가있기에 마구 불태우고 길가는 시민들에게까지 몽둥이를 휘두르는지 도시 알 수 없다.
이날의 폭력과 파괴가 경찰의 과잉방어가 발단이 되었다면 또 모를 일이다. 보도에 따르면 경찰은 마지막 단계까지 방어에만 일관했다고 한다. 이에 반해 농민들은 미리 시골에서 죽창까지 준비해 60개군 지역에서 버스 편으로 상경, 계획적인 폭력을 기도했다. 폭력과 무질서가 우발적이 아니라 사전에 계획된 의도적인 것이었다면 예사로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물론 농민들의 처지와 심정은 십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농민들이 시위에서 밝힌 주장처럼 농촌이 빚더미에 올라 황폐화되었고 작년의 고추 풍작으로 생산가에도 훨씬 못 미치는 고추폭락과 수세의 과중부담 등 울화가 치밀 일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거기다가 당국은 뾰족한 대안을 내놓지 않고 정치권도 속수 무책으로 잠자코 있으니 냉정을 잃을 법도 하다.
그러나 경위와 사정이 아무리 절박하다 하더라도 가공할 폭력을 동반한 폭거는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폭력에 호소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사고방식은 지난날 권력이 법 위에 군림해 무소위로 닥치는 대로 행사하던 것과 무엇이 다른가. 민주주의는 바로 법치주의다. 목적과 주장이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법과 질서를 파괴하고, 방법과 수단이 옳지 않으면 주장의 정당성은 사라지고 국민의 지탄을 받게된다.
농민들의 주장이 국민의 지지와 협조는 커녕 과격성으로 인해 오히려 원성과 비난을 사게 되면 설자리를 잃게 된다는 건 농민 스스로가 더 잘 알 것이다. 얼마전 죽창을 든 농민들이 영동 군청을 무려 8시간이나 점거해 군수를 꿇어앉히고 공포 분위기를 만들었을 때 동정보다 비난이 더 컸다는 사실을 명심했으면 한다.
이번 사건은 여의도 폭력시위로 끝날 성질의 일이 아니다. 우선 폭력으로 유도한 배후세력도 밝혀내야겠지만 무엇보다 고추와 수세문제에 대한 근본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처럼 정치인은 농민들의 기대감을 잔뜩 부풀리는 무책임한 선심 발언이나 일삼고 행정당국 또한 집단행동의 조짐만 보이면 고추를 찔끔찔끔 사주는 등 임시방편으로 대처할게 아니라 본원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농민들 또한 문제를 폭력과 다중의 위력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정당한 요구와 주장이라면 납득이 가게끔 순리로 풀어나가는 지혜를 발휘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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