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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P 너머 창신동, 그곳의 문화실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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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종임씨가 직접 만든 생활한복을 입고 창신동 주민들과 함께 패션쇼를 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종임씨가 직접 만든 생활한복을 입고 창신동 주민들과 함께 패션쇼를 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 종로구 창신동 낙산어린이공원. 평소 마을 쉼터로 활용되던 이곳은 지난달 30일 특급호텔 못지않은 예식장으로 변신했다. 남들보다 조금 늦은 결혼식을 올리게 된 창신동 ‘마당발’ 강성환(43)씨와 김경은(46)씨 부부를 위해 동네 주민들이 발 벗고 나선 것. 매달 마지막 수요일부터 주말까지 이어지는 ‘문화가 있는 날’ 행사가 아예 마을잔치로 자리매김한 셈이다.

봉제마을서 예술동네로 탈바꿈 #백남준·박수근·김광석 등 살던 곳 #주민 참여 패션쇼·콘서트 잇따라

창신동은 1961년 평화시장, 71년 동대문종합시장이 생긴 이래 647번지 일대를 중심으로 수천개의 봉제공장이 모여들어 봉제 거리를 형성한 동네다. 아침이면 재봉틀 소리로 하루를 열고, 한 집 건너 한 집꼴로 관련업에 종사하는 만큼 재주꾼들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됐다. 하늘엔 창신동 라디오 ‘덤’의 DJ를 맡고 있는 김선숙(50)씨가 만든 오방색 보자기가 펄럭였고, 신랑·신부 앞에는 마을 캐릭터가 된 ‘단지’ 인형을 만든 이진영(50)씨가 창신동 풍경을 담아낸 퀼트 콜라주가 펼쳐졌다.

재봉틀 위에서는 잘려나가 못 쓰는 천 조각들이 새로운 도화지를 만나 예술작품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씨는 “가로 6m, 세로 3m의 대형 작품이라 한 번에 완성하진 못하고 매달 단계별로 공개하고 있다”며 “한양도성 성곽과 절개지 덕에 한눈에 창신동이라고 알아봐 주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곳이 아니면 절대 볼 수 없는 결혼식 풍경이었다.

열두살에 창신동으로 이사와 45년째 살고 있는 김종임(57)씨는 아예 공원을 런웨이로 만들었다. 직접 디자인한 개량한복을 마을주민이자 하객들에게 입혀 모델로 세운 것. 이혜영(40)씨는 “패션쇼를 한다고 골목 입구부터 전봇대마다 곱게 써 있길래 구경왔는데 철릭 원피스가 너무 예뻐서 모델로 참여하게 됐다”고 밝혔다.

동네 곳곳을 수놓은 아트 배너 역시 김종임씨 작품이다. 매달 문화가 있는 날 행사가 있는데, 현수막이나 포스터를 한번 쓰고 버리는 게 아까워 천으로 만든 배너에 날짜만 바꿔 붙이는 방식을 고안했다. 김씨는 “미싱사로 시작해서 처음엔 직접 디자인을 하는 것이 어려웠는데 하다 보니 새로운 아이디어가 계속 떠오른다”며 “한글날에 맞춰 철릭 원피스의 허리띠는 한글로 만들어봤다”고 설명했다.

새하얀 천으로 만든 버진로드 위로 입장한 신부 김경은씨는 “결혼하고 15년 동안 이곳에 살았는데 오며 가며 만나던 동네 분들이 자기 일처럼 도와주신 덕분에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게 됐다”며 감사를 표했다. 결혼식에 참석한 주민들은 창신골축제로 발걸음을 옮겨 흥겨운 분위기를 이어 나갔다.

‘창신문화밥상’은 지역문화진흥원의 문화가 있는 날 지역 콘텐츠 특성화 사업으로 매달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기획을 맡은 아트브릿지 신현길 대표는 “봉제업무 특성상 근무 시간이 길다 보니 마땅한 여가 활동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 관객들을 직접 찾아가는 공연이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박수근 화백·가수 김광석 등 창신동에 오랫동안 살았던 예술가를 활용한 콘텐트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화예술 사회적기업 아트브릿지는 지역 콘텐트를 발굴하다 아예 창신동으로 거점을 옮긴 경우다. 2012년 ‘뭐든지 도서관’ 건립을 시작으로 자료 조사를 통해 1925년 창신동에 세워진 최초의 배우 양성소 조선배우학교를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연극 ‘단종과 정순왕후’를 만들었다. 2014년부터는 대학로에 있던 사무실과 연습실도 이전했으니 지역 주민들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창신숭인 도시재생 지원센터장을 맡고 있는 성균관대 건축학과 신중진 교수는 “창신동은 주민들이 재개발에 반대해 뉴타운으로 지정을 해제하고 도시재생 시범사업을 진행한 곳”이라며 “지난해 말로 4년간 지원사업은 끝났지만,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자력으로 지속성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전했다.

이번 달 행사는 31일 ‘누나 고마워요’를 시작으로 다음 달 3일 ‘단추캠프’까지 이어진다. 남동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봉제공장에서 일하며 뒷바라지로 60~70년 시대를 살아낸 누나들을 위해 주민센터에서 공연을 펼치는 것. 3일엔 낙산어린이공원을 중심으로 단지 인형과 함께 하는 문화탐방부터 단추콘서트·별별서커스 등 다양한 볼거리와 추억의 먹거리 등이 마련된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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