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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김구도 여운형도 이승만도 아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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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안중근(1879~1910) 의사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누구일까. 그건 백범 김구도, 몽양 여운형도, 우남 이승만도 아니었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 감옥에 수감돼 있을 때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이상설이다. 이범윤 같은 의병장 1만이 모여도 이 한 분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 바 있다. 식민지 시대, 숱한 항일 인사들 중에서도 안중근은 유독 ‘이상설(1870~1917)’을 꼽았다.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중국 뤼순 감옥에 수감돼 있던 안중근 의사.[중앙포토]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중국 뤼순 감옥에 수감돼 있던 안중근 의사.[중앙포토]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남쪽 크라스키노로 세 시간 버스를 달려서 만난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비. 멀리 보이는 검정 비석에 안 의사의 단지한 손바닥이 새겨져 있다.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남쪽 크라스키노로 세 시간 버스를 달려서 만난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비. 멀리 보이는 검정 비석에 안 의사의 단지한 손바닥이 새겨져 있다.

내년 '3·1 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이사장 소강석 목사) 주최로 22~27일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의 간도 일대의 항일독립유적지를 순례했다. 인천공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길부터 달랐다. 한국 국적기를 타면 북한 영토를 피해 동해로 빠졌다가 북쪽의 중국땅을 거쳐 다시 동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반면 러시아 항공기는 인천에서 북한 영공을 지나 곧장 블라디보스토크로 직선으로 날아갔다. 비행시간도 더 짧았다. 한반도의 분단이 새삼 실감 났다.

지금은 중국과 러시아 땅이 된 간도와 연해주 일대에는 ‘이상설의 삶과 죽음’이 기록돼 있었다. 1900년대 일제의 침탈이 갈수록 노골화하자,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조선인들은 대거 연해주와 간도로 떠났다. 위삶에 먹고 살 땅을 찾아간 이들도 많았고, 일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항일 독립운동을 꿈꾸는 이들도 있었다. 이상설은 후자였다. 충북 진천이 고향인 그는 25살 때 과거에 급제했다. 1905년 의정부 참찬일 때는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다섯 차례나 올렸다. 목숨을 건 상소였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관직을 내던졌다. 그리고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다. 1906년에는 아예 조선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간도 용정으로 갔다. 그렇게 항일운동에 몸을 던졌다.

안중근 의사의 '사상적 스승'이었던 이상설. 대한광복군 정부의 대통령을 역임한 그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중앙포토]

안중근 의사의 '사상적 스승'이었던 이상설. 대한광복군 정부의 대통령을 역임한 그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중앙포토]

나는 버스를 타고 용정촌으로 갔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무대이자, 시인 윤동주의 고향이고, 영화 ‘아리랑’을 제작한 나운규가 다니던 명동 학교가 있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북간도 일대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그곳에 ‘이상설의 뜻’이 있었다. 용정촌에 도착한 이상설은 먼저 자신의 재산을 털어서 8칸짜리 한옥을 구입했다. 당시로선 꽤 큰 집이었다. 그리고 학교를 세웠다. ‘서전서숙(瑞甸書塾)’. 서당식 교육에서 벗어나 간도 땅에 세운 첫 근대식 학교였다. 거기서 ‘이상설의 안목’이 보였다. 지속가능한 인재 양성과 지속가능한 항일 투쟁을 위한 남다른 통찰이었다.

북간도의 명동촌에 있는 시인 윤동주의 생가. 주위에는 윤동주의 시를 새겨 놓은 작은 시비들이 세워져 있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을 다닐 때에도 멀리 북간도에 있는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북간도의 명동촌에 있는 시인 윤동주의 생가. 주위에는 윤동주의 시를 새겨 놓은 작은 시비들이 세워져 있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을 다닐 때에도 멀리 북간도에 있는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시인 윤동주 생가의 입구에 세워져 있는 시비. 대표작 '서시'가 연희전문을 졸업할 무렵의 윤동주 모습과 함께 새겨져 있었다.

시인 윤동주 생가의 입구에 세워져 있는 시비. 대표작 '서시'가 연희전문을 졸업할 무렵의 윤동주 모습과 함께 새겨져 있었다.

용정촌에는 지금도 이상설의 이름을 딴 정자 ‘이상설정’이 서 있었다. 서전서숙을 세운 이듬해 고종 황제가 이상설을 헤이그 밀사에 임명했다. 이상설이 떠나자 학교는 재정난을 겪다가 문을 닫았다. 그러나 서전서숙은 ‘씨앗’이 됐다. 용정에 있던 세 개의 서당이 힘을 합해 근대식 민족교육기관 ‘명동서숙(명동학교 전신)’을 세우는 주춧돌이 됐다.

명동촌에서 바라본 선바위. 오른편에 우뚝 솟은 선바위에서 안중근 의사는 사격 연습을 했다고 한다.

명동촌에서 바라본 선바위. 오른편에 우뚝 솟은 선바위에서 안중근 의사는 사격 연습을 했다고 한다.

버스는 용정을 지나 명동촌으로 갔다. 명동촌은 용정의 이웃마을이다. 버스로 15분 거리였다. 명동촌 초입에 높다랗게 서 있는 선바위가 있었다. 윤동주 생가를 관리하며 명동촌 촌장을 지낸 송길연(63)씨는 “안중근 의사가 명동촌의 저 선바위에서 사격 연습을 했다”며 “명동학교 졸업생은 99%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고 설명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사살한 뒤 작성된 일본 헌병대사령관아카시모토지로의 비밀보고서가 최근에 공개됐다. 일제가 안 의사의 배후를 캐기 위한 문서였다. 비밀보고서에는 ‘안응칠(안중근의 아명)은 이상설에 의탁해서 당시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와 함께 간도에 갔다’고 기록돼 있다. 안 의사가 간도로 간 이유 중 하나가 이상설의 문하생이 되기 위함이었다. 안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심문을 받을 때 “(이상설은) 포부가 매우 크고, 세계 대세를 통해 동양의 시국을 간파하고 있다. 용량이 크고 사리에 통하는 큰 인물로서 대신(大臣)의 그릇이 됨을 잃지 않았다”며 자신의 ‘사상적 스승’을 평했다.

고종 황제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한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중앙포토]

고종 황제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한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중앙포토]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12㎞를 달려 우수리스크에 도착했다. 일제강점기, 이상설은 ‘사형수’였다. 헤이그 밀사 건으로 일제는 피고인이 없는 궐석 재판을 열어 이상설을 사형에 처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사형수 이상설’은 연해주 일대의 의병을 모아 13도 의군을 편성했다. 한일병합반대운동도 벌였다.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 정부를 세워 대통령에 선임됐다. 그러나 1917년 망명지 연해주에서 병에 걸려 47세에 세상을 떠났다.

러시아 우수리스크의 수이푼 강가에 세워진 이상설의 유허비. 소강석 목사가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러시아 우수리스크의 수이푼 강가에 세워진 이상설의 유허비. 소강석 목사가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버스를 타고 우수리스크의 수이푼강으로 갔다. 그곳에 이상설의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져 있었다. 그의 유언은 이랬다.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孤魂)인들 조국에 갈 수 있으랴. 내 몸과 내 유품, 내 유고는 모두 불태워 강물에 흘려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상설의 무덤은 없었다. 그의 유해는 수이푼 강물에 뿌려졌다. 북방의 바람은 차가웠다. 강물은 지금도 흘렀다. 이상설이 잠든 곳은 이국의 땅이 아니었다. 우리 가슴 속에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 역사 속이었다.

러시아 연해주에 살고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이 수이푼 강가에서 이상설의 마지막 유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상설은 자신의 유해를 이 강에 뿌려달라고 했다.

러시아 연해주에 살고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이 수이푼 강가에서 이상설의 마지막 유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상설은 자신의 유해를 이 강에 뿌려달라고 했다.

룽징ㆍ우수리스크·블라디보스토크=글ㆍ사진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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