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연구로 재판 쉰 판사들···한글자도 안내고 年 1억 챙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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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대법정 [중앙포토]

대법원 대법정 [중앙포토]

연구를 한다는 이유로 재판할 때와 같은 월급을 받으면서, 실제로는 연구를 제대로 하지 않는 판사들이 늘고 있다.

최근 3년 동안 수개월 이상 '사법연구'를 한 판사 125명 중 30명은 어떤 연구를 하고자 하는지 희망 주제조차 제출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정보공개 청구 및 금태섭 의원실의 요구에 따라 대법원 인사총괄심의관실이 밝힌 자료를 토대로 분석한 내용이다.

'사법연구'에는 세금이 들어간다. 희망주제를 내지 않은 30명의 판사에게 지급된 월급을 추산하면 17억5890만원 정도다.(고법원장 17호봉·고등부장 16호봉·지법부장 13호봉·지법판사 7호봉 기준) 인원수보다 금액이 많은 이유는 주로 고위 법관들일수록 주제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제를 내지 않은 30명 중 26명은 고등법원 부장판사(차관급) 이상의 고위 법관으로, 평균연봉이 1억1823만원 정도다(16호봉 기준).

4글자만 적어내도 6개월 재판 쉬지만…보고서는 "비공개"

2018년 상반기에 '사법연구'를 했던 판사들이 낸 '희망 연구주제'. 27명의 법관들 중 18명이 제출했다. 연구 주제는 구체적인 것도 있지만 4~6글자로 짧은 것도 있다. [자료 법원행정처]

2018년 상반기에 '사법연구'를 했던 판사들이 낸 '희망 연구주제'. 27명의 법관들 중 18명이 제출했다. 연구 주제는 구체적인 것도 있지만 4~6글자로 짧은 것도 있다. [자료 법원행정처]

희망연구 주제를 낸 경우라도 주제가 지나치게 광범위하거나 무성의한 경우도 있다. '인공지능이 탑재된 제조물에 대한 제조물책임법의 적용에 관한 연구'나 '성폭력범죄 수사·재판과정에서 피해자보호제도 검토' 구체적인 주제를 낸 판사들이 많았지만, '조세행정' '성년후견제도' 등 4~6글자만 적어낸 판사들도 있다. 한 특허법원 판사는 6개월 동안 연구할 주제로 '특허소송제도'를 냈다.

이렇게 운영되는 '사법연구'는 어떤 성과를 냈을까. 법원은 연구 보고서를 공개하기를 거부했다. 인사총괄심의관실은 "연구결과보고서는 인사관리에 관한 사항으로, 공개될 경우 공정한 업무수행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한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는 설명을 내놨다. 하지만 연구보고서가 인사실에서만 볼 수 있는 '비밀'이라는 점에 대해선 일선 판사들도 이해하기 힘들단 반응이다. 한 지방법원 부장판사는 "연구 결과를 내는 목적이 결국 실무를 하는 판사들이 봐서 도움을 받으려는 것인데 공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보고서 내라고 안 하기에 안 냈다"는 판사들 

2016년 단기 사법연구(한달 미만)를 신설한 이후 사법연구를 목적으로 재판을 하지 않는 판사 수가 늘었다 그래픽 문현경 기자

2016년 단기 사법연구(한달 미만)를 신설한 이후 사법연구를 목적으로 재판을 하지 않는 판사 수가 늘었다 그래픽 문현경 기자

실제로 제출된 결과보고서가 과연 몇 건이나 존재하는지도 미지수다. 지난해 8월 사법연구를 마쳤던 한 고등법원 판사를 찾아가 보니 "재판부 복귀 후 일이 바빠 보고서를 마무리 짓지 못했다"는 답변을 들었다. 고등법원장을 마친 후 반 년간 사법연구를 했던 한 원로법관은 "언제까지 내라는 제출기한이 없어서 결과보고서를 내지 않은 것일 뿐, 연구는 했다"고 전했다.

말은 '연구'지만 사실상 '안식년'이나 '유급휴가'처럼 이용되고 있다는 게 일선 판사들의 공공연한 인식이다. 한 지방법원 판사는 "알 만한 사람들은 사법연구가 곧 쉬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서 "공무원은 안식년이라는 것이 없고, 보수나 대우를 유지하려면 업무를 계속해야 하다 보니 (사법연구를) 변칙적으로 운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지방법원 부장판사는 "법원장 마치고 재판부 복귀하기 전에 '사법연구' 하는 분들은 정말 쉬라는 취지인 걸로 알고 있다"면서 "차라리 안식년을 법으로 만들어 운영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무노동 무임금' 판사는 예외?…'월급주는 징계'로도 활용 

사법연구는 대법원장의 일반적인 인사권 행사의 일환으로 운영되고 있다. 법원행정처는 사법연구의 목적이 "해외연수 기회를 갖지 못한 법관 에게 연구기간을 부여하고 장기근무 법관의 재교육·재충전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앙포토]

사법연구는 대법원장의 일반적인 인사권 행사의 일환으로 운영되고 있다. 법원행정처는 사법연구의 목적이 "해외연수 기회를 갖지 못한 법관 에게 연구기간을 부여하고 장기근무 법관의 재교육·재충전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앙포토]

'연구'라는 본 목적이 아닌 '재충전'이라는 다른 목적으로 변질된 제도는, 언제라도 또 다른 목적으로 쓰일 수 있다. 최근 재판거래 및 법원행정권 남용 의혹과 관련해 5명의 판사들이 '재판배제' 목적으로 '사법연구'를 명 받았다. 연구 종료일도 연구 주제도 정해져 있지 않다. 대법원 관계자는 "(논란이 된 판사들에게) 재판을 계속하게 하는 것은 국민들이 원치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사법연구 제도를 이용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월급이다. 연구도 재판도 하지 않는 고법부장 2명과 지법부장 3명에게 지급되는 세금이 매달 수천만원이다. 판사들의 익명 온라인 카페에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왜 월급을 주느냐"는 비판도 나온다. 한 지방법원 판사는 "수사받고 있는 피의자나 피고인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것과 같지 않느냐"고 말했다. 또 다른 지방법원 부장판사는 "특정 판사가 문제가 있다면 징계를 통해 정직을 하거나, 국회에서 탄핵을 하거나 해야지 징계 대용으로 사법연구를 악용하는 것은 또 다른 직권남용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취재과정에서 의견을 구한 판사들은 하나같이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사법연구가 (판사들에게도 잘 드러나지 않는) '사각지대'다 보니 징계 수단으로도 악용이 되는 것 같다." 한 지방법원 부장판사는 지금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법연구의 개념이 무엇인지, 이 제도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이 없이 운영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또 다른 지방법원의 판사는 "그동안 법원이 독립된 성처럼 운영되며 감시가 잘 안 되다 보니 방만하게 운영해 온 것 같다"고 말했다.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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