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칼럼

투표소에 꼭 가야 할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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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틀 뒤로 다가온 선거일, 투표장으로 향하는 국민의 발걸음이 가볍지 못한 것은 우리나라도 세계적으로 만연하고 있는 민주화 피로증의 예외지대가 아님을 반영하는 것이다. 1975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기점으로 확산된 탈권위주의 체제 '민주화 제3의 물결'은 세계 곳곳에서 감격과 흥분을 자아냈다. 그러나 그 후 30년이 지나면서 유럽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서의 새로운 민주주의의 실험은 혹독한 시련에 부딪혀 기복을 거듭해 오고 있다. 아시아에서 가장 성공적인 민주화의 사례로 꼽히는 우리 한국의 민주정치도 심각한 자기성찰이 요구되는 고비에 서 있음을 많은 국민은 느끼고 있다.

대부분의 민주화체제가 당면하는 위협 가운데서 군부 개입의 가능성에 관한 한 한국의 민주화는 이를 말끔히 제거함으로써 가히 모범적이라 자랑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운영의 효율성, 그리고 민주적 절차와 법질서에 대한 국민 신뢰도의 하락은 한국 민주정치의 기반이 아직도 불안하다는 진단을 피할 수 없다.

아무리 민주선거에 의해 집권한 정권이라 해도 국가안보와 국민복지를 담보하는 국가운영에서 중대한 실책을 거듭한다면 민주정치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환멸은 위험수위를 넘을 수 있다. 공정하고 민주적인 선거, 국민의 기본권 신장 등이 국가운영의 능률과 효율성을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에 이러한 논리가 무시될 때 민주정치의 위기는 자초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국가운영의 아마추어리즘으로 말미암은 실패를 변호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는 원래 추상보다 구체를 추구하는 가치체계이며 막연한 이념의 포로가 되는 것을 예방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의한 국가운영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더구나 세계시장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국의 위치를 확보하는 데 실패한 정권은 단순한 민주정부라는 명분만으로 그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구소련.중앙아시아.라틴아메리카에서 일어나는 비극적 사례들을 결코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다.

한편 중동의 무슬림 국가 등에서 확대되고 있는 민주제도에 대한 부정적인 풍조는 문명의 갈등에서 비롯되고 있다. 선거를 비롯한 민주적 절차나 제도를 확립하는 것이 오히려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세력에 쉽게 동화되는 주체성의 위기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적 믿음이나 이념적 소신이 민주적 절차인 다수결의 원칙에 우선해 법에 대한 복종 여부를 결정하게 되는 반민주적 입장이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문명충돌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주주의의 입지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세계적 위기에 대해 우리라고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 나라를 세우고 지키고 발전시켜 오는 데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과 피를 흘렸는가. 또 그 험난한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 왔는가. 그러나 우리는 과거사에 얽매어 있을 수만은 없다. 세계사의 전환기에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머뭇거리는 자에게는 미래가 없다. 앞서가는 조국, 머뭇거리지 않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는 다음 두 가지만이라도 명심해야 할 시점이다.

첫째, 홍익인간(弘益人間)을 기본이념으로 삼은 우리 대한민국은 능률만을 지상의 가치로 삼는 나라는 결코 아니다. 그러나 고도의 능률이 없는 국가운영으로는 살아남기 힘든 어려운 시기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온 국민이 깊이 인식해야 한다. 그러기에 민주주의의 원리와 국가운영의 효율성을 어떻게 동시에 담보할 수 있는지에 우리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둘째, 우리는 다행히 종교적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이며 지역적 갈등의 폐해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나라다. 지금 당면한 위험이 있다면 그것은 민주적 절차와 법질서를 무시하며 자신들만의 주장을 강요하는 독선과 오만의 만연이라 하겠다. 민주선거는 바로 그러한 반민주적 세력을 용인할 수 없다는 국민적 의지를 표출하는 소중한 기회임을 되새겨야 하겠다.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