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콜」수상 궁지에 몰려|리비아 화학공장 건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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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미국과 리비아간의 리비아 화학무기 공장을 둘러싼 논쟁은 엉뚱하게 미·서독간의 논 전으로 번져 서독정부의 도덕성이 국내외적으로 비판을 받으며「헬무트·콜」수상이 정치적 궁지에 몰리고 두 나라의 국제적으로 이름난 언론인이 매주 주거니 받거니 논 전을 벌이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지난해 말부터 리비아 랍타 지역의 화학무기 공장건설에 서독회사가 참여하고 있다고 미국이 밝히면서 비롯되었다.
서독정부는 미국의 주장이『증거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서 서독회사들의 관련사실을 부인했다.
이렇게 되자 미국은 오래 전부터 서독이 이 공장에 대한 자료를 제공해 왔음을 밝히고 국내언론에 그 경위를 흘러 여론전쟁에 나섰다.
뉴욕타임스가 신년호에서 서독회사가 리비아화학무기공장의 설계 및 건설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독가스탄을 이스라엘의 텔아비브로 수송하는 전폭기의 재급유문제에도 지원했음을 폭로하고 나섰다.
미 언론들은 보도나 칼럼 등을 통해 리비아가 생산하려 하는 화학무기가 아랍지역 분쟁에서뿐만 아니라 국제 테러분자들에 의해 이용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얼마 되지 않은 1, 2차 세계대전에서 처음으로 독가스를 생산, 수백만 명의 무고한 시민을 희생시킨 선조들의 죄를 알고 있는 독일인들은 오늘도 테러국가들이 독가스로 시민을 살해할 음모에 더 민감해야 한다』(「월리엄·사파이어」뉴욕타임스 89·1·2)고 충고했다.
이 말은 서독 인들에겐 과거의 상처를 건드리는 가슴아프면서도 불쾌하게 받아 들여졌다. 서독의 대표적 주간잡지『슈피겔』지의「루돌프·아우그슈타인」발행인은 이에 대해 세계에서 화학무기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전면폐기를 반대하는 나라가 어느 나라냐고 반격하고 나섰다.
미국이 참을 수 없는 여론전쟁을 펴고 있다고 본 서독에선 자기합리화 주장이 무성한 가운데 분노한「콜」정부는 미국이 제시한 증거를 무시하고 미국이 대 리비아 전략에 우방국을 끌어들이면서 서독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려 한다고 대응하고 나섰다.
「콜」수상의 한 측근은 미국이 비열한 여론 전을 중단하지 않으면 미국에 있는 독일문화 연구소를 폐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서독정부의 이같은 대미 반격은 곧 조용해지고 말았다.
미국과 설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 서독정보기관들이 87년 초부터 리비아 관련음모를 인지하고 정부에 보고했으며 서독정부도 이에 대한 은밀한 조사를 했음이 잇달아 폭로되고 있고 검찰이 10여 개 관련회사들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미국과 서독의 논쟁은 서독국내 문제로 번져 사민당 등 야당은「콜」수상의 이 문제처리가『미-서독간의 관계를 심각할 정도로 손상시켰고 세계에 독일이 공적으론 화학무기금지를 요구하면서 극비로 분쟁지역에서 화학무기생산을 조장해 온 것으로 비치게 했다』면서「콜」수상이 개인적인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고 있다.
서독정부의 발표를 인정한다 해도 서독정보기관은 87년 8월 이 의문의 리비아공장에 대한 정보를 정부에 보고했고 본 주재 미대사관은 88년 5월 서독정부에 3개 회사의 관련을 조언했으며 서독회사들이 리비아로 위장 수출했음이 밝혀졌다.
이번 미-서독정부와 언론의 감정싸움은 서독의 패배로 끝나 가고 있다. 그러나 이 싸움 뒤에는 유럽핵무기의 현대화, NATO공군의 저공훈련 등을 반대하며「고르바초프」의 정책에 신뢰를 갖고 급속한 동구접근을 펴며 EC통합을 주도하고 있는 서독의 외교안보 정책에 대한 미국의 의구심과 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미국의 간섭을 덜 받으며 독자적인 소리를 넓혀 가려는 독일의 심리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미-서독 관계가 예전처럼 매끄럽지만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박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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