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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방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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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판소리 '심청가'에서 심봉사가 딸 청이에 대한 그리움을 호소하는 때는 5~6월께다.

"봄이 가고 여름이 되니 녹음방초 시절이로고나/산천은 적적한디 물소리만 처량허네/딸과 같이 놀던 처녀들이 인사를 허니/딸 생각이 더욱 간절허구나." 우거진 나무그늘과 향기로운 풀이 꽃보다 나은 때라는 의미로 초여름은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로 표현된다. 이때 내리는 비는 녹우(綠雨)이며, 수풀에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은 훈풍(薰風)으로 불린다. 심봉사의 애틋한 부정(父情)은 생죽음을 당한 딸이 '이 좋은 세상'을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에서 비롯됐다.

토정 이지함은 "녹음방초에 누에 올라 술잔을 기울이니, 산새들이 날아와 즐겁게 노래한다"며 인생의 절정기를 녹음방초에 비유했다. "어진 덕으로 즐겁게 지내면 날로 복을 더하며, 어느새 모은 재물은 천금으로 불어난다"며 풍요로움의 상징으로도 여겼다. 화창한 봄과 서늘한 가을의 중간에 있는 녹음방초의 계절에 현인달사(賢人達師.어진선비)들은 산을 찾아 바위 등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며 입신양명(立身揚名)을 다짐했다. 동시에 속세를 벗어나 풍류를 즐기는 때이기도 하다. 가야금 병창의 대표곡 중 하나가 '녹음방초'인 것도 비슷한 이유인 것 같다.

녹음방초는 사람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해 준다. 삼림욕이 각광을 받는 것은 나무가 발산하는 향기에 그 비밀이 있다고 한다. 나뭇잎에서 나오는 피톤치드 같은 방향성 물질은 스트레스 해소는 물론 심폐기능을 강화시켜 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녹음방초가 주는 고요함은 마음을 다스리는 계기를 줘 정신을 맑게 해 준다. 성철 스님은 "연한 숲 내음을 깊이 들이마시다 보면 마음 한 켠에 갇혀 있던 답답함과 변화무쌍했던 감정들이 어느새 사라진다"고 말했다. 녹음방초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좋은 정신적 피난처인 셈이다.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던 과정에서의 불법행위로 또 영어의 몸이 됐다. 그는 "꽃은 네 번 졌어도 녹음방초의 계절이 다시 왔다"며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3년 전 검찰에 구속되면서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며 조지훈의 시 '낙화'를 인용하기도 했던 그의 이번 발언에서 권력의 덧없음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녹음방초의 시기에 꽃이 떨어지는 의미를 알았으면 하는 점이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박재현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