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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노벨의 가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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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호 35면

고선희 문학평론가·방송작가·서울예대 교수

고선희 문학평론가·방송작가·서울예대 교수

“이러지 마 제발. 우린 끝났어.” 여자가 소리치자, 남자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만 끔벅이고 있었다. 한때는 그들의 달콤한 데이트 장소였을 공원의 한적한 산책로에서였다. 이별에 다다른 사랑을 기어이 되돌려 놓겠다는 듯 청년은 상대의 어깨를 부여잡지만, 여자는 그 손을 강하게 뿌리치고 돌아섰다. 우연한 목격자인 나는 얼른 길을 돌렸다. 본 척 해줘야 하는데, 왜 헤어지게 됐을까, 지금 어떤 심정일까, 마음이 쓰여 힐끗 돌아보니, 여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청년만 혼자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때 이른 낙엽이 축 처진 그의 어깨 위로 떨어져 내렸다.

어느덧 10월, 노벨상 수상자 선정 소식이 차례로 들려오니 또 한 해를 마무리할 때가 오고 있음이 실감된다.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주목하는 부문이 다르겠지만, 6개의 노벨상 부문에서도 제일 보편적인 관심은 평화상과 문학상에 몰려있다. 대중사회에 미치는 파장도 두 부문이 가장 크다. 그래서 올해 문학상 수상자를 선정하지 못하게 됐다는 소식은 적잖은 충격이다. 작년엔 대중음악인인 밥 딜런의 수상으로 화제가 되더니 올해엔 선정 위원의 비리와 추문 때문에 수상자를 낼 수 없다니, 문학과 예술의 영역에도 뭔가 새롭고 무거운 질문이 던져진 것 같다, 노벨상의 권위에 전적으로 동의해 온 입장은 아니면서도 말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노벨도 한 때 글을 썼었다고 한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고 사업에도 놀라운 수완을 발휘했던 그가 희곡을 직접 써 남겼다니 그 내용이 궁금하지 않은가. 사실 그 작품은 이십 대의 노벨이 파리의 한 약국 판매원을 흠모해 애태웠던 실제 경험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문학에 대한 노벨의 공식적 입장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에게 문학이 어떠한 역할을 해주었는지는 그 희곡의 존재로도 짐작 가능하다. 무엇을 소재로 어떻게 이야기하든 문학은 세상을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되돌아보게 한다.

삶의 향기 10/19

삶의 향기 10/19

문학의 측면에서 알프레드 노벨이란 한 사람의 일생을 바라보면, 그는 누구보다 고독한 일생이었던 것 같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평생 몇 명의 여성을 사랑했지만 그 누구의 마음도 얻지 못했다. 단 한 사람과도 맺어지지 못한 채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중년의 그는 소설가이자 평화운동가인 한 여성에게 강렬히 이끌렸는데, 이미 약혼자가 있었던 그녀는 노벨의 마음과는 달리 곧 결혼해 ‘폰 주트너’ 남작 부인이 되었다. 하지만 노벨은 이후에도 계속 그녀와의 교류를 이어갔다. ‘무기를 멈추라’라는 제목의 반전 소설로 당시 유럽 사회에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 평화운동가였던 그녀는, 노벨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평화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말년의 노벨이 어떤 생각을 했으며 노벨상을 만들게 된 결정적 계기가 무엇인지, 전해오는 몇 가지 일화들이 있지만 확인되지 않았거나 와전된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여성평화운동가인 주트너 부인의 영향으로 노벨상에 평화상 부문을 추가하게 됐다는 설은 상당한 근거가 있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그가 그녀를 깊이 사랑했었으며, 노벨 사후 최초의 여성 평화상 수상자도 주트너 부인이었다는 사실에서 노벨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 위대한 일도 누군가가 어느 한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한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게 그만큼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공원 산책로에서 실연의 충격에 빠져있던 그 청년이 지금 가장 바라는 건, 그녀의 마음을 다시 얻는 일일 거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상대방의 마음도 존중되어야 하니 그의 바람은 세상에서 제일 이루기 힘든 소망이기도 한데…. 지금의 그 간절함으로 더 좋고 더 넓은 마음을 지닌 이와 다시 만나게 되길 바란다. 그 마음을 얻으려는 에너지로 세상에 더 선한 영향을 미치게 되길 바란다, 노벨과 그의 마음을 움직였던 평화운동가 그녀처럼.

고선희 문학평론가·방송작가 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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