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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의 문명기행

공생 아닌 공방의 터였기에 임진강은 서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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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훈범 논설위원

이훈범 논설위원

아름다움은 흔히 혹독함과 동행한다. 수려한 겉꺼풀을 벗기면 이내 모진 속살을 드러내기 일쑤다. 산하(山河)가 특히 그렇다. 그 아름다움은 감상의 대상이지만 필연적으로 다툼의 대상이 되고 마는 까닭이다. 양차 대전 때의 프랑스처럼 아름다운 산하가 기름지기까지 하다면, ‘전장(戰場)’이 되는 운명을 피하기 어렵다. 인간의 탐욕과 야만의 분출구 말이다.

쇠락 보여 애잔한 고구려 옛성 #여러 번 주인 바뀐 칠중성에서 #나당 연합군에 후고구려군 궤멸 #한국전쟁 땐 영국군, 중공 저지

아름답고 기름진 임진강 유역도 그래서 혹독한 속살을 갖고 있다. 세월에 닳아 무뎌졌지만 여기저기 잔재한 뾰족함을 숨기지 못한다. 삼국시대 각축의 흔적들이다. 그중에서도 고구려의 슬픈 자취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 이곳이다.

‘공생(共生)’의 의지를 담은 포(浦)가 아니라, ‘공방(攻防)’의 기운이 서린 성(城)이어서 슬프다. 임진강 줄기를 따라 연천에만 3개의 고구려 성이 있다. 상류서부터 임진강 지류인 차탄천과 한탄강이 만나는 언덕에 은대리성, 개성에서 양주로 바로 통하는 강 절벽에 당포성, 서울과 평양을 잇는 최단 육상코스가 지나는 적벽 위에 호로고루성이 있다. 모두 걸어서 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을 지키기 위함이다.

호로고루성과 당포성은 맞춘 듯 빼닮았다. 삼각형 모양으로, 두 변은 강의 절벽과 언덕을 자연 성벽으로 이용하고, 한쪽 변만 돌과 흙으로 성벽을 쌓았다. 비용을 최소화한 경제적인 축성 방법이다. 은대리성은 둘레가 1㎞로 국내에 남아있는 고구려 성 중 가장 큰 규모다.

호로고루성에서는 연화문 와당과 비늘 모양 치미(지붕 용마루 장식) 같은 기와류가 많이 출토됐다. 고대사회에서는 귀한 건축자재다. 당포성에는 없는 지하 물 저장고도 있다. 이곳에 국경사령부가 있었을 거라 추측하는 이유다. 탄화된 곡물도 발견됐는데, 조가 가장 많았고 쌀·콩·팥도 있었다. 소·말·개·멧돼지·사슴·노루의 뼈도 발견됐다. 고구려 병사들이 좁쌀을 주로 먹었고, 6종 이상의 육류를 섭취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재미있는 건 발견된 토기(편)의 크기로 볼 때, 고구려 병사들이 오늘날 사람들보다 4배나 많은 양의 밥을 먹었을 거라는 사실이다.

고구려의 옛성 호로고루성 위에서 바라본 임진강. 삼각형 모양으로 2개 변을 자연성벽으로 활용한 경제적인 축성방법이다. [이훈범 기자]

고구려의 옛성 호로고루성 위에서 바라본 임진강. 삼각형 모양으로 2개 변을 자연성벽으로 활용한 경제적인 축성방법이다. [이훈범 기자]

이들 성터에 서면 고구려의 쇠락을 보는 것 같아 애잔하다. 대륙을 호령하던 제국은 이제 남쪽 국경선마저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임진강 이북으로 밀렸던 것이다. 고구려의 웅혼을 느낄 수 있는 성(터)도 남아있다. 임진강 최하류, 한강과 합류하는 지점의 오두산성이다. 오늘날 통일전망대가 있는 곳이다. 이 성은 원래 백제의 성이다. 이곳을 잃을 경우 수도 한성까지 위태로워지는 요충이다. 하지만 일곱 길로 밀려드는 광개토대왕의 대군을 막지 못하고 함락되고 만다. 이후 백제는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하지만 쇠락의 길을 걷고 만다. 그래서 또한 서글프다. 한번 꺾인 기세는 다시 세우기 어려운 법이다.

오두산성의 옛 이름이 ‘관미성(關彌城)’이다. “사면이 가파르고 바닷물에 둘러싸였다(四面峭絶 海水環繞)”는 『삼국사기』 구절 탓에 강화도다, 예성강 하구다 의견이 분분했었다. 그러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으로 원래 백제 관미성(臨津漢水交合處 本百濟關彌城)”이라는 설명이 있는 게 뒤늦게 발견됐다. 교과서에 모범답안이 나오는데 끝까지 읽어보지도 않고 답이 이거네 저거네 다퉜던 거다. 그렇다고 위치 논쟁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지만, 일곱 길로 공격했다거나 백제가 그렇게 관미성을 되찾고자 노력한 요충이란 점에 비춰볼 때 오두산성이 개연성 있어 보인다.

가장 사연이 많은 곳은 파주 적성에 터가 남아있는 ‘칠중성’이다. ‘일곱 번 굽이돈다’고 해서 신라인들이 부르던 임진강의 옛 이름 ‘칠중하(七重河)’에서 따온 이름이다. 『삼국사기』는 신라 선덕여왕 때 축조됐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원래 백제의 땅이었던 만큼 백제성이었다는 추측이 맞을 듯하다. 개성에서 서울을 내지르는 통로인데다 임진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군사적 요충을 백제가 내버려 둘 리 없는 까닭이다.

그러다 신라 손에 넘어갔다가 다시 고구려가 주인이 된다. 이후 고구려가 망한 뒤 마지막 고구려군이 이곳에서 당나라 군사에 궤멸돼 고구려 부흥운동이 와해되고 만다. 이후 당나라의 대대적 공세를 칠중성에서 지켜낸 신라는 여세를 몰아 매소성(경기도 양주)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어냄으로 당을 몰아내고 통일을 완성한다.

이 정도 말고는 적과의 싸움에서 내세울 만한 것을 임진강은 기억하지 못한다. 남으로 북으로 속절없이 밀려 후퇴한 기억뿐이다. 임진왜란 때 한강 방어에 실패한 조선군은 임진강에 방어선을 친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왜군은 강변에 소수의 군사만 남겨두고 파주 쪽으로 철군했다. 도원수 김명원은 적군의 유인작전임을 간파했지만, 왜 싸우지 않느냐는 조정의 독촉에 할 수 없이 도강작전을 벌인다. 결과는 다 안다. 왜군의 기습 공격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수많은 병사들이 임진강에 수장된다. 이후 상황을 박동량의 일기 『기재사초』는 이렇게 전한다.

“적이 임진 하류에서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널 듯이 하면서 아군을 시험했다. 부원수 이빈이 화살 한 발 쏘지 않고 먼저 도망가서 모든 군사가 일시에 무너졌다. (상류를 지키던 전 유도대장) 이양원 등은 적이 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북도로 달아났다.”

이 장면은 350여년 뒤 또다시 반복된다. 반대 방향으로다. 1950년 6월 25~28일 사이 전차를 앞세워 고랑포를 건너온 북한군의 기습 남침에 한국군은 속절없이 밀려나야 했다. 그나마 1951년 4월 이 일대에서 고립된 영국군 대대병력이 3만여 명의 중공군의 진격을 사흘 동안 저지시키는 수훈을 세웠다. 한국군은 ‘설마리 전투’, 영국군은 ‘글로스터 고지 전투’라고 부르는 한국전쟁 중 기념비적인 한 장면이다. 중공군 춘계공세의 예봉을 꺾고, 유엔군이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