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1월 30일 국회 5·18광주민주화진상조사특위의 속기록을 들여다봤다. 근래 진보 진영으로부터 ‘훼절자’로 비난받는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 건 때문이다. 80년 ‘김대중(DJ) 내란음모 사건’으로 기소된 24명 중 한 명이었던 그가 당시 허위자백한 게 DJ의 중형 선고에 결정적이었던 양 거론돼서다.
서른의 그는 22세 때인 서울대 총학생회장 시절을 진술하며 이렇게 말했다. “학생운동의 최선봉대에 선 이로서 (5·15) 서울역에서의 (시위대를 회군하는) 결정적인 오류를 범했고 (중략) 조사받을 때도 고문에 굴복했었으며 법정에서도 그 아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얘기하고 자포자기와 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어 가는 연속선상이었다. (중략) 전두환과 그 일당은 목숨을 내걸고 정권을 빼앗으려 하는데 우리는, 나는 내 목숨을 내걸고 싸운 것이 아니었다. 그 점이 저는 지금도 그렇게 부끄럽다.”
그러자 한 청문위원이 위로했다. “그 당시엔 힘 있는 자가 누르고 탄압하는 데는 할 수 없는 것 아니냐.” 실제로 그랬다. 다들 고문을 받았고 어느 정도는 허위 자백을 했다. DJ도다. 그래야 살았다. 다른 이들이 덜 고생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혼자 버텨봐야 소용없다고도 느꼈다. 가깝다고 여기는 이들이 등을 돌리기도 했다.
어느 정도 심했는지 알고 싶을 터인데 다음은 DJ가 80년 당시 정기용 군 검찰에게 했다던 말이다. “정 선생, 나는 살아있기만 하면 재기 가능하오. 그러나 죽으면 재기할 수 없어. 정 선생이 어떻게 좀, 나 사형 좀 면하게 한번 해주시오.”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수괴 혐의만은 적용하지 말아 달라는 요청이었다고 한다. 78년 반국가단체로 지정된 한민통(한국민주통일연합) 연루 혐의였다. 정기용 변호사는 “DJ의 범죄 사실 중 오히려 국가보안법 위반이 위험했다. 법정형이 사형인 그런 범죄를 검찰관 임의로 기소유예를 할 수 없다. (DJ에게) ‘설마 죽이기야 하겠느냐’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그런 시대였다. 따지고 보면 다들 피해자였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대부분 유공자가 됐다. 상당수가 정계에 입문했고 세상을 쥐락펴락한다. 사회적 인정도 받은 셈이다.
그런데 심 의원의 근래 행적을 비판하기 위해 맥락을 잘라버린 채 38년 전 일을 흘린다? 온당한 일인가 싶다. 심 의원이 호불호가 갈리는 정치인이긴 해도 말이다. 그가 같은 진영이라도 그랬을까. 회의적이다. 그리고 너무 ‘복고’다.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