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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1980년의 소수 의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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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수정
김수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수정 논설위원

김수정 논설위원

아버지는 참지 못하고 장남의 서울 신혼집을 찾아왔다. 사법시험에 수석 합격하고 연수원도 수석 졸업한 아들(서동우 변호사)이 법관이 아닌 변호사의 길을 걷겠다고 하자 “그러면 호적에서 파겠다”고 했다. 1년 만에 대법원 판사를 그만둔 게 한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이 그 한을 풀어주기를 바랐던 게다. 지난 4일 90세로 타계한 서윤홍 전 대법관 얘기다. 서 전 대법관은 1980년 신군부의 서슬이 퍼럴 때, 김재규 등 10·26 사건 피고인 7명에 대한 대법원 재판에서 이들의 행위를 ‘내란음모로 볼 수 없다’는 소수 의견을 낸 6인 중 1인이다.

80년 5월 20일 대법원은 피고인들의 상고를 “내란죄의 증거가 인정된다”며 기각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207일 만의 확정판결이었다. 전원합의체 판사 14명 중 6명이 다른 의견을 냈다. “내란 목적이 되려면 넓은 범위의 모의와 폭동 및 지역 평온을 해치려는 계획이 있어야 한다” “대통령직에 있는 자연인 살해인지, 국헌문란 목적의 살인행위인지 사실과 증거 심리를 더 해야 한다”는 등이다. 이 중 막내였던 서 대법관의 의견이 판결문 맨 뒤에 기록됐다. 김계원·이기주·유성옥·김태원에 대한 의견이다. 김계원에 대해선 ‘일련의 거동에서 의문이 보이기는 하나 추리와 정황에서 연유된 것일 뿐’ ‘총격 직후 김재규를 고발하지 않은 것이 석연찮다 해도 내란죄의 중요 임무에 종사한 것으로 결론짓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했다. 서윤홍은 “육군고등군법회의의 판결에 잘못된 점이 있고, 상고 논지가 이유가 있음에도 그대로 유지하려는 다수 의견에 찬동할 수 없다”고 끝맺었다.

그 뒤 국가보위입법회의 인사가 서윤홍을 찾아왔다. 사표를 종용했다. 서윤홍은 “내가 자네에게 사표를 낼 수 없고, 내더라도 대법원장에게 낼 테니 가라”고 한 뒤 대구로 내려갔다. 79년 4월 임명된 지 1년여 만의 일이다. 소수 의견을 낸 대법관 5명은 그해 8월, 1명은 이듬해 옷을 벗어야 했다. 서윤홍은 이후 대구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서 전 대법관의 타계로 ‘6인의 대법관’(민문기·양병호·임항준·김윤행·정태원·서윤홍)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살벌한 정치권력에 굴하지 않고 이들이 소수 의견을 낸 바탕은 법리에 충실한 법관으로서의 양심이었다. 사법부 독립의 대원칙이기도 했다. 40년이 흐른 지금. ‘묵시적 청탁’이라는 창조적 발상, 대법원의 ‘재판 거래’ 의혹, ‘전 정부를 견제’했음을 자랑으로 내세운 대법관 후보자의 정치적 편향성 논란이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답답하다.

김수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