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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윤의 시시각각] ‘척하면 척’의 어두운 그림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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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4호 34면

김종윤 논설위원

김종윤 논설위원

선출된 권력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갈등은 불가피하다. 1970년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에 임명된 아서 번스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설령, 법적 도덕적으로 옳지 않아도 그의 권위에 복종해야 날 받아들일 것 같다.”

권력 압력에 금리 정책 휘둘리면 #경제는 불신의 늪에서 비틀거려

번스는 자신을 임명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그림자에 짓눌렸다. 닉슨은 의장 취임식에서 “번스의 독립성을 존중한다. 그렇지만 내 견해가 따를 만하다는 걸 독립적으로 판단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7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닉슨의 ‘견해’는 저금리였다. (닐 어윈, 『연금술사들』)

중앙은행은 인류 지혜의 산물이다. 인류는 중앙은행에 돈을 찍어 발행하는 독점 권한을 주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새뮤얼슨 교수는 세 가지 위대한 발명품으로 불, 바퀴 그리고 중앙은행을 꼽았다.

돈을 너무 풀면 물가가 뛴다. 적게 유통하면 경기가 가라앉는다. 전 세계 중앙은행의 공통 목적은 물가 안정이다. 선출된 권력의 속성이 여기서 충돌한다. 이들은 경기를 띄우려는 유혹에 늘 노출된다. 유권자의 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이 외부 압력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정의는 그래서 필요했다. 중앙은행장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된 이유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고뇌에 빠졌다. 권력은 장기간 저금리로 인해 부동산 가격이 급등했다고 몰아붙인다. 부동산 시장만 보면 금리를 올려 돈줄을 조이는 게 필요하다. 하지만 성장판이 닫히는 경제 상황을 고려하면 금리 인상은 오판이 될 수 있다. 중앙은행 정책금리는 건물을 뚫고 들어가 표적만 정밀 폭격하는 벙커버스터가 아니라 한 방에 숲을 몽땅 태우는 네이팜탄이다.

박근혜 정부 때 임명된 이 총재는 문재인 정부에서 연임됐다. 과거의 행적은 그에게는 부담이다. 2014년 7월 박근혜 정부 2기 경제사령탑이 된 최경환 부총리는 노골적으로 경기 부양을 외치고 다녔다. 당시 기록.

“금리 인하 문제와 관련해 ‘금’ 자도 안 나왔다. 금리 결정은 한국은행 고유 권한이라…”(7월 21일 이 총재와 회동 후). 8월 14일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15개월 만에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내렸다.

“이 총재와 와인 한잔했다. 금리의 금자 얘기도 안 했지만 ‘척하면 척’이다 .”(9월 22일 호주 G20 재무장관·중앙은행장 회의 후). 10월 15일 금통위는 금리를 또 내렸다.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도 고쳐매지 말라고 했는데, 우연의 일치인가. 금통위는 다음 해 6월까지 두 차례 더 금리를 낮췄다. 부동산 시장으로 돈이 쏠리고, 가계 부채가 더 부풀게끔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이번에도 공교롭다. 이 총재는 4일 “가계 부채 증가세가 지속하면서 금융 불균형이 심해졌다. 이를 점진적으로 해소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금리 인상을 위한 깜빡이를 켠 것인가. 올 상반기 Fed가 두 차례 금리를 올릴 때도 꿈쩍하지 않았던 금통위에 ‘척하면 척’의 그림자가 또 드리운다.

1979년 물가가 불안하자 지미 카터 대통령은 폴 볼커를 Fed 의장으로 긴급 등판시켰다. 볼커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금리 인상 행진을 시작했다. 최악의 경기 침체와 실업이 부각되면서 정치권이 들끓었다. “학살자”라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볼커는 흔들리지 않았다.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확실히 꺾었다.

볼커의 선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축복으로 판명 났다. 저금리에 연명하던 좀비기업이 정리되면서 80년대 미국의 대안정기(the Great moderation)를 열었기 때문이다. 물가가 잡히자 카터는 마음을 놓았지만, 곧 슬픈 운명을 만났다. 이듬해 대선에서 유권자는 카터를 철저히 외면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휘두른 칼에 선출된 권력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한국은행의 통화신용정책은 중립적으로 수립되고 자율적으로 집행돼야 한다(한국은행법 3조). 중앙은행을 압박하는 권력, 제 역할 못 하는 중앙은행, 그 사이에서 경제는 비틀거린다.

김종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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