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호 시집 '과속방지턱을 베고 눕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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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작가세계』에 「샛강의 노래」외 4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1967년생 늦깎이 김병호 시인의 첫 시집이다. AM 6:20에서 출발하여 AM 02:15에서 끝이 나는 그의 이번 시집은 총 7부로 나누어져 유례없이 독창적인 기획을 선보이고 있다. 물론 그에 따르는 시편들 또한 각 부의 분명한 성격을 대변하고 있는 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유자재로 옷을 바꿔 입는 그의 대범하고 멋스러운 시 스타일에 일단 눈길이 가는 바이다.

그의 시는 무엇보다 남성다운 힘이 강하게 느껴진다. 펜을 들고 백지 위에서 오래 고민하기보다는 앞을 향해 전진하는 활달한 손놀림이라고나 할까. 그는 언어를 탄력 있고 유연하게 쓸 줄 안다. 그만큼 논리적이라는 얘기인데 이 근거는 시집 각 부에 골고루 흩어져 있는 자연과학의 시적 변용 사례들(「슈뢰딩거 방정식」 「리트머스 루메」「뉴트리노」 「사이비 위상학」)에서 일단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까 그는 말이 되지 않는, 납득이 되지 않는 시는 쓰질 않는다는 얘기다. 단순히 ‘자연과학의 결론들을 나이브하게 활용하는 것이 아닌’, 물리학도 출신답게 자기화하여 시를 풀어내는 힘, 그 때문에 그는 오늘도 과학과 시의 경계 사이에서 생성되는 강한 자기장을 일단 온몸으로 흡수하고 있는 중이다.

한편 그에게서 주목할 만한 또 한 가지는 바로 서정이다. 그의 서정은 무뚝뚝한 남성의 말없음으로 대변되지만 그 속도가 무척이나 빠르다는 데에 그 주안점이 있다. 이때 그는 제 시 바탕에 안 보이는 거미줄처럼 깔려 있는 신화의 레일 위를 미친 듯이 달려 나간다. 물론 거추장스러운 부연 같은 가방은 다 내버린 채 말이다.

사랑의 시작에서 절정, 그 너머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달음에 치고 빠지는 그의 속력전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이야기의 구도에 모터를 달아준 격이 된다. 그만큼 그의 언어들은 질량이 높고 속도가 빠르다. 또한 그는 ‘대체로 미시물리학의 눈으로’ 생활의 공간과 일상의 시간을 끝까지 좇으며 넘쳐나는 에너지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렇다. 그는 검증되지 않고 검증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함부로 입을 열지 않는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 제 자신과의 거리감을 상당히 넓게 유지했으며 때문에 쉬운 감정토로마저 다 배제했다. 그런 연유로 그의 시는 속내는 서정성이 농후하나 외피는 건조함을 입었다. 쿨한 사랑의 현장처럼.

이때 그로 인해 발휘되는 서정에는 남다른 힘이 있다. 이를 두고 해설을 한 신형철의 말을 빌어본다. “덧없는 시간의 기미들 속에서 드러나는 존재의 처연한 빛깔들을 보듬으면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그림자 같은 삶을 미시물리학자의 눈으로 응시하는 이 사내는 감정을 낭비하지 않았고 쉽게 말하는 기술에 투항하지 않았다. 특이한 방식으로 서정적 아름다움에 도달하지만, ‘살아봐야겠다’는 식의 서정적 계몽주의에는 끝내 무관심하다. 그는 아무것도 가르치려 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무언가를 배우고 말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긴장하자. 아무래도 이 사내는 시인인 것 같다.”

■ 지은이 : 김병호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1998년 『작가세계』에 「샛강의 노래」 외 4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했고, 거미(巨微) 동인으로 활동했다.

■ 정가 : 6,000원

(조인스닷컴 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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