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북한 「경제개방의 문」열리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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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북한이 89년을 「경공업의 해」로 설정, 주민의 생활향상을 위한 경제건설 및 대외경제협력 확대를 추구하는 정책을 지속, 강화할 전망이다.
김일성은 신년사를 통해『기계공업과 전자공업을 발전시켜…유연 생산체계를 널리 받아들이면 우리나라경제발전에서 새로운 질적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며 어렵고 힘든 노동에서 완전히 해방되어…우리 근로자들의 세기적인 염원이 실현될 것』이라고「정책목표」를 제시했다.
이와함께 특히 올해는「증대하는 인민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방직공장·일용품 공장 등을 「만부하」(완전가동)로 돌리고 제품의 질을 결정적으로 높이도록 촉구하기도 했다.
표면적으로 지금까지 혁명노선을 고수하여 대결적 자세를 늦추지 않는 것으로 보이던 북한이 「경제건설」을 강조하고 나선 것은 의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미국의 대북한 채널의 하나인 스탠퍼드대 국제전략연구소 「존·루이스」소장도 최근 북한의 가장 중대한 변화로서 무엇보다 경제발전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북한이 경제건설에 주력하면서 대외경제협력을 위한 조건을 채비하기 시작한 것은 74년으로 소급되며, 그 이후 경제정책상의 일관성이 유지되어온 궤적을 찾아볼 수 있다.
북한은 84년 국가명절이기도 한 김정일의 생일에 맞추어 「인민생활을 더욱 향상시킬데 대하여」라는 연설을 당 내부에 발표하고 해외의 기술·자본 유치를 위한 합영법도 제정했다.
폐쇄와 획일성으로 특징지워지던 북한사회에 제한적이나마 다양한 변화가 나타난 것도 이때부터였다.「인민의 욕구」를 반영하듯 하이힐의 굽이 3㎝에서 7㎝로 높여져 공급되고, 양복스타일의 유행주기도 덩달아 단축되었다. 평양의 한 거리에는 한꺼번에 24개의 식당이 등장하고 사우나·헬스클럽도 생겼다.
주민에 대한 서비스를「혁명적으로」개선하기 위해 접대원과 판매원이 양성, 배치되었다. TV·녹음기 등 가전기기에 대한 내부수요증가 문제가 제기되는 일방, 「가내작업반」의 소득사업을 위한 직판장이 곳곳에 설치되어 부분적인 상행위가 부활되었다.
이밖에도 「연애륜리」를 주제로 하는 중·장편소설이 출현하고, 일부 청소년에 해당되지만 「미제국주의 문화의 상징」인 청바지도 유행되고 있다. 86년부터는 외국관광객을 받아들여 연간3만명을 넘어서고 지난해부터는 사실상 「한국인」인 재미교포들도 북한을 방문하기에 이르렀다.
지난해 10월 방북한 르몽드지의 「필립·퐁스」기자는 이같은 변화분위기들을 접하고 『북한이 서서히 개방추세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젊은 세대 사이에 물질적 보상을 추구하는 풍조가 생기고 있으며 정부도 이를 무시하지 못하고있다』는 인상을 전하고 있다.
혁명도상에 있다는 북한에서 한 사례로 의상문제만 하더라도 「복고주의」나「자본주의적 폐풍」은 금기시 되어온 만큼 상당한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듯하다. 그만큼 북한의「경제노선」은 정권유지 및 경제 안보적 필요에서 뿐 아니라 북한주민들의 현실적요구가 담겨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북한은 경제건설추진과정에서 86∼88년에 걸쳐 막대한 차질을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이근모 정무원 총리가 전격 해임되고 정치국에서도 배제된 것은 이에 대한 문책이라 할수있다.
북한은 지난해 11월말부터 12월 중순에 걸쳐 그때까지의 경과를 일단 총괄하고 89년의 정책방향을 정립하는 조처들을 취했다.
즉 김일성의 신년사에서 재확인된 첨단기술 발전을 골자로 하는 정책과업을 제시하고 첨단기술이 경제발전의 「사활적 문제」임을 강조하여 경제수행 방식의 변화를 시사했다.
또 11월26일에 「합영공업부」를, 다음달 15일에는「전자·자동화공업위원회」를 정무원에 독립부서로 신설하여 이 분야의 업무를 관장할 행정조직을 정비했다.
대외개방을 위한 준비로 보이는 이같은 처리과정에서 북한노동당이 첨단기술촉진을 결의한 바로 그 다음날 총리해임을 단일 의제로 하는 최고인민회의를 소집했던 것은 북한식 「정경분리」를 당이 의도적으로 분명히 한 것으로 볼수 있다.
즉 국가활동에서「당의 지도강화」와 이념적 일관성이 강조되는 가운데 행정집행기관인 정무원이 정책수행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책임진다는 형태다.
『북한당국의 공식적 기록은 분명히 부정적이지만 행동은 결코 부정적이지 않다』는 「존·루이스」소장의 경험도 이에 연관된다. 북한의 표면적 행동을 근거로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미묘한 변화를 주시해야한다는 의미다.
이같은 시각에서 적대적인 남북한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최근 활발하게 거론되고 있는 남북한 직교류가 올들어 구체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전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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