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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영광이지만 자식엔 미안한 마음뿐”…대통령 선물에도 못 웃는 100세 할머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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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노인의 날'…100세 노인 1343명에 장수 지팡이 선물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왼쪽)이 2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제22회 노인의 날 기념식'에서 100세 유칠상(가운데) 할아버지, 박순자 할머니께 장수지팡이 청려장을 전달하고 있다. [뉴스1]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왼쪽)이 2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제22회 노인의 날 기념식'에서 100세 유칠상(가운데) 할아버지, 박순자 할머니께 장수지팡이 청려장을 전달하고 있다. [뉴스1]

“가문의 영광이지만 자식에겐 미안한 마음만 드네요.”

1일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서 만난 박순자 할머니는 기자에게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1918년생인 그는 올해 만 100세가 됐다. 이를 기념해 박 할머니는 2일 낮 12시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리는 ‘제22회 노인의 날’ 행사에서 청려장(靑藜杖·장수지팡이)을 받는다. 청려장은 명아주로 만든 가볍고 단단한 지팡이로 ‘건강·장수’를 상징한다. 올해는 특별히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쓴 축하카드도 같이 수여된다. 수상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박 할머니는 “최근 고령화 사회가 진행되면서 젊은 사람들이 아주 힘들다고 한다”며 “대통령께 축하를 받는 일이 기쁘면서도 오히려 내가 오래 살아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크다”고 말했다.

“여보 사랑해. 오래 살아요.”

1일 서울 중구 중림동에서 기자와 만난 유칠상 할아버지(1918년생)는 옆에 있던 부인 황순애(82) 할머니에게 이 말을 연신 반복했다. 올해 만 100세가 된 유 할아버지도 2일 노인의 날 행사에서 박 할머니와 함께 청려장과 카드를 받는다. 그에게 부인인 황 할머니는 인생의 60여년을 함께 해온 고마운 사람이다. 평안남도 순천군이 고향인 유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간 일본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졸지에 고아 신세가 됐다. 다행히 일본인 양부모를 만나 와세다대학까지 다녔지만, 해방 후 홀로 고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때 황 할머니를 만나 결혼해 고락을 함께했다. 지금도 부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이유다. 그는 "지난 추석엔 북한이 보낸 송이버섯을 청와대로부터 받았다"며 "장수지팡이로 대통령께 선물을 두번 받아 기쁘다"고 말했다.

“기쁘지만 고령화 시대에 자식에 짐 될까 걱정”
100세 시대를 시작한 두 노인의 수상 소감엔 이처럼 가족들에 대한 걱정과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건강은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칠 수준이 아니다. 자식에게 짐이 될 것을 걱정하는 박 할머니는 하지만 지금도 버스정류장 2~3곳 정도의 거리는 홀로 걸어서 다닌다. 1일 신길동 둘째 딸 집에 놀러 온 그는 이날도 저녁에 아들 집인 노원구 상계동까지 홀로 지하철을 타고 돌아갈 생각을 했다. 딸 길옥근(77)씨는 “어머니는 자신을 데리러 가기 위해 손자가 퇴근길에 들르는 것을 미안해했다”며 “지하철로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를 홀로 가겠다는 걸 겨우 말렸다”고 말했다.

제22회 노인의 날을 맞아 대통령으로부터 명아주 지팡이를 선물받은 유칠상 100세 할아버지가 1일 서울 중림종합사회복지관에서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준 축하 카드를 들어보이고 있다. 최정동 기자

제22회 노인의 날을 맞아 대통령으로부터 명아주 지팡이를 선물받은 유칠상 100세 할아버지가 1일 서울 중림종합사회복지관에서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준 축하 카드를 들어보이고 있다. 최정동 기자

유 할아버지 역시 지팡이를 짚고 스스로 거동을 하는데 불편함이 없다. 귀가 많이 어둡지만 기자가 종이에 질문을 적어 보여주자 글씨를 또박또박 쓰며 자신의 생각을 성실히 답했다. 수화도 수준급 실력을 자랑한다. 딸 유을미(63)씨는 “아버지는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한국을 방문한 관광객들을 안내하겠다는 생각으로 70대에 수화 공부를 시작했다”며 “현재는 본인의 청력 상태가 좋지 않게 되자 더욱 수화 공부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1일 서울 중구 중림사회복지관에서 만난 100세 유칠상 할아버지(왼쪽)가 기자의 질문에 손글씨를 써 답하고 있다. 오른쪽은 부인 황순애 할머니. 이승호 기자

지난 1일 서울 중구 중림사회복지관에서 만난 100세 유칠상 할아버지(왼쪽)가 기자의 질문에 손글씨를 써 답하고 있다. 오른쪽은 부인 황순애 할머니. 이승호 기자

올해 청려장을 받는 노인은 박 할머니와 유 할아버지를 포함해 1343명이다. 보건복지부가 노인의 날(2일)을 기념해 1993년부터 매년 100세가 되는 노인들에게 주는 장수 선물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 청려장을 받은 100세 노인은 연 500명이 채 안 됐다. 하지만 2004년 455명에 불과했던 청려장 수상 노인의 수는 지난해엔 3배가 넘는 1423명이 됐다. 개인 건강관리 습관 등이 개선되며 고령화 속도가 빨라진 덕분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100세 이상인 노인은 3908명이다. 여성이 3358명, 남성이 550명이다. 100세인 연구를 해온 박상철 전남대 석좌교수는 “장수는 집짓기와 비슷한데 과거엔 환경·유전자 등 토대가 중요했지만 최근엔 사회안전망·의료혜택 등 지붕 중요성이 커졌다”며 “빠른 고령화 추세는 지붕 요인이 강화된 영향”이라고 말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긍정적 사고방식과 소식이 장수 비결
100세인의 건강 비결은 뭘까. 통계청은 지난 2015년 100세가 넘은 고령자 3159명을 전수조사했다. 응답자의 39.4%는 소식 등 ‘절제된 식습관’을 가장 먼저 장수비결로 꼽았다. 이어 규칙적인 생활이 18.8%로 2위, 낙천적인 성격이 14.2%로 3위에 올랐다. 또 100세 이상 고령자들 가운데 ‘현재 삶이 행복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34.4%에 달했다. 박상철 교수는 “장수엔 지붕과 토대 외에 기둥도 필요한데 이는 영양·운동·참여·관계 같은 개인 생활습관”이라며 “소식과 운동, 다양한 활동과 가족·이웃과의 긍정적 관계 형성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여행이 취미…미국 직원이 할머니 나이 보고 놀라

박 할머니와 유 할아버지도 이 같은 생활습관을 실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장수비결로 취미생활을 우선적으로 꼽았다. 박 할머니의 취미는 여행이다. 제주도부터 강원도까지 전국 각지를 안 다녀본 곳이 없을 정도다. 할머니는 “젊었을 적에 못했는데 새로운 곳을 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면 살아있음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지난 주말에도 가족들과 함께 인천 월미도를 다녀왔다.

“장구·난타 하면 세상사 근심걱정 사라져”

100세 유칠상 할아버지(오른쪽)가 3년 전 광복 70주년을 맞아 용산전쟁기념관에서 장구 공연을 준비하는 모습. [사진 유을미]

100세 유칠상 할아버지(오른쪽)가 3년 전 광복 70주년을 맞아 용산전쟁기념관에서 장구 공연을 준비하는 모습. [사진 유을미]

3년 전까진 막내딸 길옥분(67)씨가 사는 미국 미시간주에도 큰 불편 없이 다녀오곤 했다. 길씨는 “입국심사와 항공기 탑승 과정에서 미국 직원이 엄마와 여권을 번갈아 보며 나이가 맞는지 여러차례 확인했을 정도”라며 “10년전 까지는 가족이 동행하지 않고 혼자 항공기를 타고 미국을 오셨다”라고 말했다. 유 할아버지의 취미는 장구와 난타 공연이다. 그는 “복잡한 세상사를 다 잊고 무아지경에서 흥을 느끼면 근심이 사라진다”고 했다. 3년전엔 광복 70주년을 맞아 용산전쟁기념관에서 장구 공연을 하기도 했다. 난타 공연은 지금도 복지관 분들과 함께 연습하고 있다.

긍정적 사고방식과 절제된 생활습관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유 할아버지는 “남을 미워하지 말고 항상 친절해야 한다”며 “모든 인생을 운명에 맡기고, 욕심을 부리지 않고 내 복대로 마음 편안하게 살면 복이 온다고 생각하며 산다”고 말했다. 박 할머니는 “삼시 세끼를 거르지 않고 먹는다”며 “과식하지 않으면서도 영양을 고려하고, 항상 가벼운 운동을 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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