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권력 세습' 비난에 발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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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니 무바라크

아들 가말 무바라크

중동의 대표적 친미 지도자인 호스니 무바라크(78) 이집트 대통령이 미국에 독설을 퍼부었다. 중동 지도자들을 포함한 1300여 명의 외교사절이 모인 세계경제포럼에서 20일 개막연설을 하면서다. 포럼은 시나이 반도에 있는 이집트의 대표적인 휴양지 샤름엘셰이크에서 열렸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우선 "이스라엘의 핵 보유는 묵인하고 이란의 핵 프로그램만 문제 삼는 건 이중 잣대 적용"이라며 비난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도 "엉뚱한 명분을 내세워 일으킨 전쟁"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경제 정책과 관련, "주요 경제 대국이 자국의 이익만을 도모해 개발도상국에 엄청난 부담을 지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미국이 '중동지역 민주주의 확산'을 시도하는 데 대해 "중동 국가의 내정에 개입해 서구식 민주주의를 강요하고 있다"며 "다자주의와 국제법을 존중하고 일방주의를 지양하는 세상 만들기에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에 '예스 맨'으로 통했던 무바라크가 이렇게 강도 높게 미국을 비난한 건 이례적이다.

알자지라방송은 무바라크의 이 같은 비난이 최근 미국과의 불편한 관계를 반영한다고 분석했다. 미국이 최근 들어 이집트의 민주화가 느리다고 비난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 말 총선 부정을 폭로한 이집트 법관 2명이 오히려 징계당하고, 대선 후보를 지낸 야당 지도자 아이만 누르가 5년 징역형을 받자 미국은 "큰 실수"라며 강력히 비판했다.

무바라크가 특히 흥분한 이유는 권력 세습을 위해 차기 대권 후보로 밀고 있는 자신의 차남 가말이 비밀리에 미국을 방문했다가 냉대당했기 때문이다. 가말이 미국에 머무는 동안 미 의회는 "미국이 매년 20억 달러씩 지금까지 600억 달러를 이집트에 지원한 결과가 권력 세습이냐"고 정부에 공세를 펼쳤다.

무바라크는 이번 연설에서 "지나치게 급진적인 개혁과 외부 압력은 '혼란'만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계속 친미 국가로 남기를 바란다면 부자 권력 세습을 인정하고, 지나치게 압박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미국에 보낸 것으로 풀이된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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