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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말하러 여기 섰다" 美대법관 청문회 뒤흔든 36년 만의 '미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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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 5일(현지시간) 미 상원 법사위 청문회에 출석해 의원들 질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브렛 캐버노 연방대법관 후보자. 청문회는 캐버노 성폭력 의혹으로 연기됐다가 27일 재개됐다. [AP=연합뉴스]

지난 5일(현지시간) 미 상원 법사위 청문회에 출석해 의원들 질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브렛 캐버노 연방대법관 후보자. 청문회는 캐버노 성폭력 의혹으로 연기됐다가 27일 재개됐다. [AP=연합뉴스]

27일(현지시간) 열린 브렛 캐버노 연방대법관 상원 청문회에 성폭력 피해 증인으로 출석한 크리스틴 포드 교수. [AP=연합뉴스]

27일(현지시간) 열린 브렛 캐버노 연방대법관 상원 청문회에 성폭력 피해 증인으로 출석한 크리스틴 포드 교수. [AP=연합뉴스]

"캐버노가 대법관으로 적합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내 책무가 아닙니다. 내 책무는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청문회 증인 포드의 모두 발언)

캐버노 후보 청문회서 '성폭력' 피해 여교수 증언 #공화당 남성들 대신해 성범죄 전담 여검사가 질문 #제5 피해자도…트럼프 "청문회 따라 마음 바꿀 수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명한 두 번째 연방대법관 브렛 캐버노(53)에 대한 상원 청문회가 27일 오전 10시(현지시간, 한국시간 밤 11시) 열렸다. 이번 청문회는 여러모로 이전 대법관 청문회와 달랐다. 지난해 미국을 시작으로 전 세계를 강타한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캠페인 이후 처음으로 미투 파문에 휩쓸린 사법부 최고위직에 대한 인준 절차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미디어가 주목하는 가운데 이날 청문회 증인으로 선 이는 캘리포니아 팰로앨토 대학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크리스틴 블레이시 포드(52). 포드 교수는 지난 1982년 고교 시절 한 파티에서 만난 캐버노 후보자가 만취 상태에서 자신을 성폭행하려다 실패했다고 주장해 왔다. 36년 간 묻어왔던 일을 이제야 들추는 것에 대해 포드는 “법조인으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며 망설였지만 이제는 사회적 책무를 다할 때”라고 밝혔다고 미 언론은 전했다. 캐버노는 현직 워싱턴 연방 항소심 판사다.

27일(현지시간) 열리는 브렛 캐버노 미 연방대법관 청문회에 공화당 측 법사위 의원들을 대신해 성폭력 의혹을 질문하게 될 레이철 미첼 검사. [AP=연합뉴스]

27일(현지시간) 열리는 브렛 캐버노 미 연방대법관 청문회에 공화당 측 법사위 의원들을 대신해 성폭력 의혹을 질문하게 될 레이철 미첼 검사. [AP=연합뉴스]

다음날인 28일 인준 표결이 예정된 상황에서 상원 법사위는 어느 때보다 긴장감이 돌았다. 연방의사당 건물에는 수십 명의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이 몰려와 '캐버노 지명 철회'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지난해 할리우드 성폭력 고발이 잇따를 때 해시태그 '미투' 운동을 제안했던 여배우 알리사 밀라노도 모습을 드러냈다.

공화당 측이 이례적으로 초빙한 원외 질문자도 눈길을 끌었다. 전원 남성인 공화당 법사위원을 대신해 포드를 상대로 질문을 던진 이는 애리조나주 마리코파 카운티 소속의 베테랑 여검사 레이철 미첼이다. 주로 아동 성폭행 등 성범죄 전담 부서에서 20여 년 간 활약해온 미첼 검사는 2005년 가톨릭 사제 폴 르브런의 소년 신도 성추행과 관련해 111년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공화당이 여성 검사를 질문자로 초빙한 이유는 1991년 청문회의 ‘학습 효과’ 때문이다.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의해 지명된 보수 성향 흑인 대법관 후보 클래런스 토마스(현 연방대법관)도 인준 표결 직전 성희롱 의혹에 휩싸였다. 당시 35세였던 흑인 여성 애니타 힐은 TV에 생중계된 청문회에서 자신의 상사였던 토마스 후보자가 평소 어떻게 성희롱을 일삼았는지 낱낱이 증언했다.

하지만 전원 남성이었던 법사위 의원들은 오히려 힐에 대한 ‘피해자 책임 묻기’식 질문으로 일관했다. 결과적으로 토마스는 종신 연방대법관에 인준됐지만 여성계와 진보 언론은 '편향 질문'이 초래한 결과라며 강력히 비판했다. 이번엔 여성 검사에게 '칼자루'를 쥐어줌으로써 공화당 측은 '캐버노 편들기' 비판을 사전 차단하는 효과를 노렸다.

91년 당시엔 토마스가 사상 두 번째 흑인 연방 대법관 후보라는 점에서 인종 차별 논란도 일었다. 이에 비해 캐버노의 경우엔 지난해 불어닥친 미투 운동이 강력한 영향을 발휘할 전망이다. 힐도 26일 유타대 강연에서 “미투 운동은 장기적 해결책의 기회를 제공했다”며 이번 사안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현재 브랜다이스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힐은 “1991년 위험에 빠진 것은 만인에 대한 법의 평등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브렛 캐버노 미 연방대법관 청문회를 맞아 재조명되고 있는 1991년 대법관 청문회. 당시 TV로 생중계된 증언을 통해 아니타 힐(오른쪽)은 후보자 클래런스 토마스(왼쪽, 현 연방대법관)가 지속적인 성희롱을 가했다고 폭로했다. [AP=연합뉴스]

브렛 캐버노 미 연방대법관 청문회를 맞아 재조명되고 있는 1991년 대법관 청문회. 당시 TV로 생중계된 증언을 통해 아니타 힐(오른쪽)은 후보자 클래런스 토마스(왼쪽, 현 연방대법관)가 지속적인 성희롱을 가했다고 폭로했다. [AP=연합뉴스]

캐버노 후보자는 자신에 대한 의혹을 "중상모략"이라며 부인했지만 포드의 주장과 별개로 피해 폭로가 잇따랐다. 캐버노의 예일대 동창인 데버러 라미레스라는 여성도 1980년대 초 파티에서 그가 자신에게 성적으로 부적절하게 행동했다고 폭로했다. 청문회를 하루 앞둔 26일엔 줄리 스웨트닉이라는 여성은 변호사를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고교시절이던 1980년대 초 집단성폭행을 당했으며 이 현장에 캐버노도 있었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내놨다. 청문회 당일에도 2명의 여성이 성폭력 피해를 주장했다는 보도가 나와 총 5건이 됐다. 27년 전 홀로 싸워야 했던 힐에 비해 여성들이 미투 운동에 자극받아 적극 나서는 양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보적인 입장이다. 그는 뉴욕 유엔총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캐버노와 관련된 질문을 받자 “제기된 의혹들은 내게 모두 거짓으로 들린다”며 청문회를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앞서 트럼프는 트위터를 통해 “캐버노 판사는 좋은 평판을 가진 좋은 사람이며, 그는 급진 좌파 정치들의 공격을 받고 있다”면서 “이들 정치인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고 그들은 파괴와 (인준)지연만을 원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관련 의혹이 잇따르자 26일엔 "만일 설득력 있는 증거가 제시된다면 내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고 말했다.

브렛 캐버노 미 연방대법관에 대한 '미투' 폭로가 잇따르는 가운데 청문회를 하루 앞둔 26일(현지시간) 워싱턴 연방의사당 건물에서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이 캐버노 지명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AFP=연합뉴스]

브렛 캐버노 미 연방대법관에 대한 '미투' 폭로가 잇따르는 가운데 청문회를 하루 앞둔 26일(현지시간) 워싱턴 연방의사당 건물에서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이 캐버노 지명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AFP=연합뉴스]

캐버노가 인준될 경우 9명으로 구성되는 대법원은 보수 우위로 재편된다. 대법원은 현재 진보 성향의 앤서니 케네디 전 대법관이 퇴임한 이후 보수와 진보가 각각 4대4 구도다. 트럼프 대통령은 캐버노 합류를 통해 낙태, 이민 문제, 의료 보험 개혁 등 쟁점에서 주도권을 잡겠다는 복안이었다. 현재 상원은 법사위(11대10) 뿐 아니라 전체 숫자도 공화당이 51 대 49로 우세하기 때문에 단순 표결 땐 다수결 통과가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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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리한 표결 인준 땐 트럼프 행정부는 물론 공화당에도 역풍이 불 수 있다. 앞서 토마스 대법관 인준 땐 이듬해 치러진 중간 선거에서 페미니즘이 의제로 떠오르면서 사상 최대의 여성후보가 출마·당선됐다. 당시 여성 연방하원 의원은 28명에서 47명으로, 여성 상원의원은 2명에서 6명으로 늘었다.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가뜩이나 트럼프 대통령을 둘러싼 갖은 성추문에 허덕이는 공화당이 캐버노 청문회 여론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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