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필품 「원정사재기」가 불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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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공산종주국임을 자랑으로 여겨온 소련이 심각한 소비재난을 완화하기 위해 캐비아(철갑상어의 알젓)에서 냉장고와 어린이 신발에 이르기까지 수출금지 조치를 취한 것을 계기로 동구공산형 제국들간의 무역불화가 한층 노골화하고 있다.
서방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흔히 수입규제가 무역분쟁을 야기하지만 공산세계는 수출규제가 무역분쟁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동구권의 화폐가 서방 세계에서 통용될 수 없기 때문에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소련은 소비재 부족에 시달리는 자국민에 대한 보호책이라고 볼 수 있는 이번 조치에서 소련 방문자들이 긴요한, 소비재를 반출하는 것도 규제키로 했는데 서방여행자들은 구태여 질이 떨어지는 소련제 소비재를 사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동구권에서 온 여행자들이 규제를 당하게 마련이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공산권의 경제동맹체인 코메콘 내부에 이와 같은 불편한 기류가 생긴 것은 꽤 오래된 일이지만 이처럼 노골적인 마찰이 빚어지기는 최근의 일이다.
체코와 동독·폴란드가 소련보다 한발 앞서 이러한 자국산 소비재 보호조치를 취했는데 그 속셈은 같은 동구권여행자들에게 물건을 팔아봤자 국제적으로 통용력이 없는 화폐를 받게되기 때문에 자국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에서 취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프라우다지의 보도에 따르면 88년 1∼10월까지 10개월간 소련은 TV 40만대, 냉장고 20만대, 세탁기 5만대가 빠져나갔으나, 이제 이러한 부족생필품의 대외판매가 전면 금지되는 동시에 외국인 여행자들은 소비재의 경우 1백루블(1백65달러) 이상을 구매할 수 없도록 했는데 이는 물론 달러를 갖고있는 서방이 아니라 루블을 갖고 소련을 찾아오는 동구 공산권여행자를 겨냥한 것이다.
소련이 이러한 궁여지책을 취하게 된 데는 소련의 원유생산이 예상보다 저조한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하는 관측도 있다. 실제로 소련의 원유생산량은 지난해 3·4분기부터 하루 10만 배럴씩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코메콘회원국들의 이러한 무역전쟁은 근년 들어 해외여행규제가 완화되고 이를 틈타 자국에서 부족하거나 비싼 상품을 이웃 공산국에서 무더기로 사들여 오면서 불붙기 시작한 것이다.
공산국들은 국민들의 불만이 높아 가는 대신에 생필품을 비롯한 소비재의 국내충당이 어렵게되자 여행자의 환금 한도액을 늘려 이웃 공산국에 가서 생필품을 구매토록 하는 정책을 써왔는데 폴란드는 특히 코메콘 경제시스템을 잘 이용해서 이득을 취한 나라로 꼽히고 있다.
체코만 하더라도 지난해에 3백30만명의 폴란드 방문객을 받아 들였는데 이들의 80%는 당일 치기였다. 즉 여행이 목적이 아니라 쇼핑이 주목적인 방문객들로서 흡사 메뚜기 떼처럼 체코의 상점을 뒤져 필요한 것을 쓸어가 체코 국민들을 곤란하게 만들었으며 여기에 소련·동독·헝가리 여행객들이 소비재파동을 부채질했다.
결국 체코는 지난해 11월 자국상품보호조치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프라하의 관리들은 이러한 조치가 있기 전 구두 4켤레 중 1켤레만이 체코 사람에게 돌아 갈 정도였다고 말하고있다.
이 조치가 있은 후 체코에 온 소련여행자들이 치약·손수건에서 구두·털 코트에 이르기까지 대량 몰수당한 사태가 벌어졌으며 며칠 후 동독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보여지는 규제조치를 취하더니 이번엔 소련이 비슷한 조치를 취하기에 이르러 날이 갈수록 「동무들」의 치고 받기가 가열되는 느낌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모스크바뉴스가 갈파했듯이 『사회주의 화폐로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물건을 살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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