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 집단발포는 대대장 지시|"전교사서 자위권발동 명령" 박준병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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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국회광주특위(위원장 문동환)는 21일 박준병 당시 20사단장·정웅 당시 11사단장·서명원 당시 전남대학생과장 등 3명을 증인으로 출석시켜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신문을 벌이고 올해 광주특위 청문회활동을 일단 매듭지었다. <신문내용 3, 4면>
또 5공 특위가 22일 전두환씨를 증인으로 불러 일해 청문회를 열 계획이나 전씨 불 출석이 확실해 국회특위의 올해 청문회는 사실상 모두 끝났다.
광주특위는 내년 1월 중순께 청문회를 재개, 전두환·최규하 전대통령 등의 증언을 들을 계획인데 22일 전체회의를 열어 내년의 특위운영·청문회일정·증인선정문제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5공 특위는 4개 소위활동만 벌이며 내년 청문회계획은 아직 세우지 않고 있다.
이날 광주청문회에서는 박준병씨에게 20사단동원 경위, 미국 측과의 협의내용, 진압작전 과정 등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박준병씨는 『광주문제는 광주시민이 최대의 피해자이며 국민과 군대도 피해자』라고 말하고 『양심세력도, 그리고 보수세력도 피해를 보았으나 공권력을 행사하는 쪽에 있던 사람들이 사과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박씨는 『80년 5월 17일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공사교장이던 김인기 소장이 제일 먼저 발언했으며 참석자중 한사람이 「시나리오대로만 하면 되느냐. 토의하자」고 말했다』고 밝혔다.
박씨는 광주에서 자위권 발동명령은 21일 오후 8∼9시 사이에 전교사로부터 받았으며 사전경고 조치와 하퇴부를 쏠 것 등의 추가명령이 있었다』고 말했다.
박씨는 27일 오후 도청진압 작전에는 20사단 3개 연대가 다 투입됐으나 도청진입 부대는 61연대 1대대 1중대(중대장 조치규 대위)라고 말했다.
박씨는 12·12사태 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에 대해 『79년 12월 9일 전두환 보안사령관 집에 불려가「12월 12일 저녁 6시30분쯤 30경비 단으로 혼자 오라. 참모총장을 수사하는 관계로 이야기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듣고 12일 저녁 경복궁의 30경비 단 모임에 참석했다』고 말해 사전계획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박씨는 『79년 10월 26일 이동도중 CFC(한미연합사)로부터 20사단 작전지휘권 이양을 승인 받았다는 것을 알게됐다고 말하고 『80년 2월 5일자 육본명령에 의해, 62연대는 작전통제권이CFC에 인계되지 않은 채 복귀했다』말했다.
박씨는 80년 5월 20사단의 서울대 출동에 있어 작전통제권이 CFC로 인계되지 않은 61연대와 62연대를 1차로 옮긴 뒤 이미 작전통제권이 CFC로 넘어간 60연대와 포병단은 5월 16일 CFC와 육본협의 후 서울로 이동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20사단이 시민과 충돌한 것은 21일 저녁 광주∼목포간 도로 고개 등 4차례이며 이 과정에서 시민 10명과 군인 2명이 사망했다』고 말하고『이중 마지막 진압작전 때 20사단에 의해 숨진 사람은 민간인 4명과 군인 1명』이라고 증언했다.
이에 앞서 20일 열린 청문회에서 최웅 당시 공수11여단장은 『80년 5월 21일 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에 의한 집단발포는 자위권이 부여되지 않은 상태에서 61대대장 안부응 중령이 독단적으로 결심, 행사한 것이라는 사후보고를 받았다』고 말하고『당시 공수부대는 실탄을 지급 받지 않았으며 안 중령이 인근에 배치했다가 철수하는 31사단 보병2개 분대의 실탄1천5백∼1천6백발을 인수해 장교인 지대장들에게 10발씩 분배, 발포는 이들 지대장에 의해 이뤄졌다』고 증언했다.
최씨는 『시민군이 먼저 발포했다』며 『12시 이후 시민군 쪽에서 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면서 총알이 날아왔고 병력이 뒤로 밀리는 상황에서 한 병사가 시민군 장갑차에 발사했고 버스 1대가 돌진해 장교들이 반사적으로 사격을 가해 버스운전사는 사망했다』고 당시상황을 설명했다.
최씨는 『흥분한 군중들이 주변옥상에서 총을 쏘았으며 계엄군은 그때까지 분명히 실탄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밝혔다.
최씨는 11여단의 광주이동과 관련, 『18일 오후 3시쯤 육본으로부터 광주출동 명령을 받았고 오후 4시쯤 정호용 사령관이 찾아와 7공수 33대대와 35대대가 광주시내의 유언비어 때문에 고전하고 있으므로 11여단이 광주에 출동해달라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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