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리비아 모델' 북한에 적용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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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미국의 이번 조치는 '선(先) 핵 폐기, 후(後) 관계 정상화'라는 '리비아 모델'의 완성을 뜻한다는 점에서 북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리비아는 2003년 12월 미국과 대량살상무기(WMD) 프로그램의 완전 폐기에 합의하고, 핵 관련 시설을 자진 해체해 미국으로 보냈다. 리비아식 해법을 통해 미국은 핵 폐기에 따른 반대급부 제공 약속은 반드시 지키며, 정권교체나 체제 전환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을 북한에 보여 주고 싶은 것이다. 대(對)리비아 국교 정상화 발표에 맞춰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리비아는 북한과 이란에도 중요한 모델"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핵 개발 초기 단계에 있던 리비아와 달리 북한은 이미 사실상의 핵 보유국이다. 또한 비록 교착 상태에 있지만 북한 핵 문제에 대해서는 6자회담이라는 공식적인 다자간 협상 틀이 있다. 따라서 '리비아 모델'을 그대로 적용해 북한에 일방적인 핵 폐기를 요구하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다만 리비아식 해법은 미국과 리비아 최고지도자의 위임을 받은 양국 정보 당국 핵심 관계자들의 9개월에 걸친 물밑 협상의 결실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리비아 모델'의 교훈을 통해 6자회담의 교착 국면을 타개하려면 블레어와 같은 충실한 중재자가 나와야 한다. 또 미국과 북한 양국이 최고지도자의 의지를 실어 비공식적 직접 교섭에 나서야 한다.

미국은 81년과 86년 두 차례나 리비아를 폭격했다. 그 정도로 미국과 리비아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 두 나라의 국교 정상화는 국제 관계에 영원한 적은 없다는 진리를 새삼 입증하고 있다. 미국과 북한이라고 변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