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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특사단이 해야 할 말, 하지 말아야 할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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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뭔가 잘 안 풀린다. 이대로 가면 북·미 대화는커녕 남북 정상회담도 위험하다. 오늘 5인의 특사단이 북한에 가는 이유일 게다. 정확히 6개월 만이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그래서 더욱 6개월 전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특사단은 지난 3월 5일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4시간12분 동안 담판을 지었다. 다음날 서울에 돌아온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발표한 ‘방북 결과’ 전문은 6개 항이었다. ①4월 말 남북 정상회담 실시 ②정상 간 핫라인 설치 ③북측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함 ④북측은 비핵화 문제 협의 및 북·미 관계 정상화를 위해 미국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할 용의 표명 ⑤대화 중 추가 핵실험 및 미사일 시험발사 중단 ⑥남측 태권도시범단과 예술단 평양 초청이 그것이다. 돌이켜보면 숫자 면에선 큰 성과다. 대다수가 지켜졌기 때문이다.

곁가지 아닌 비핵화 핵심을 못박아야 #미국에 북 발언 불가역적 전달은 금물

하지만 악마는 디테일이 아닌 핵심, 즉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있었다. 핵심에 확신이 없으니 진전이 없다. 방북 직후 특사단은 워싱턴을 방문해 북측이 밝혔다는 비핵화 의지③와 미국과의 대화 용의④를 강조하며 설득했다. 그래서 ‘북·미 정상회담 수락’이란 월척을 낚아냈다. 이른바 ‘웨스트윙 현관 앞 회견’에서다. 하지만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대화는 꽉 막히고 말았다. 비핵화 프로세스는 시작도 못 했다. 우리 특사단이 틀림없다고 보장했던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의문부호가 붙으면서다. 불신의 불똥은 한국 정부로까지 튀고 있다. 미 정부의 핵심 관계자는 “그동안 협상을 해 본 결과 북한은 비핵화를 할지 여부를 결정하지 못한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바꿔 말하면 우리의 전언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단팥빵’이라고 해서 샀는데, 팥은 없고 겉에 설탕만 잔뜩 발라놓은 ‘무늬만 단팥빵’이었다는 게다. 설탕에 속고 말았다.

처음부터 계획된 북한의 스토리일까. 현재로선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치 않다. 지금의 결과가 중요하다.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선즈화는 『최후의 천조(天朝)』에서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의 대립과 경쟁을 파고들어 어부지리로 최대한의 이익을 손에 얻었다”고 했다. 1961년 7월 불과 닷새 사이에 러시아, 중국을 오가며 두 나라 모두와 군사동맹을 맺은 걸 말한다. 서로 싸우는 두 대국을 동시에 자국의 방패막이로 삼은, 외교적 줄타기의 백미였다. 어부지리가 뭔가. “비가 오지 않으면 넌 목말라 말라죽을 것”이라 조개에게 입을 열라고 협박하는 황새, 잡혀먹히지 않으려고 “내가 이대로 꽉 물고 있으면 너야말로 굶어 죽고 말 것”이라 버티는 조개, 이들의 다툼을 틈타 어부가 힘들이지 않고 둘 다 잡아가는 이야기다. 57년 전 황새와 조개는 소련과 중국, 어부는 김일성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자리엔 미국과 중국, 김정은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오늘 북한에 가는 특사단의 어깨는 무겁다. 북·미 협상의 돌파구를 찾으려 할 것이다. 핵심은 곁가지가 아닌 구체적 비핵화 조치여야 한다. 다만 공격적으로 북한을 설득하되, 수비적으로 미국에 전달해야 한다. 6개월 전 그랬듯 “역시 북한은 비핵화하기로 맘을 굳혔다”거나 “종전선언을 하면 핵 시설 리스트를 공개한다고 분명하게 약속했다”거나 하는 ‘불가역적 발언’은 금물이다. 두고두고 “한국은 어부(김정은) 편”이라 낙인찍힐 수 있다. 한·미 간 균열을 유도하는 김정은의 노림수이기도 하다. 미 정부 내 목소리가 제각각이고, ‘판단’은 결국 미국의 몫이란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 특사가 해야 할 일과 말, 하면 안 될 일과 말을 마음에 새기고 다녀오길 바란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