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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시시각각

한반도 문외한, 북핵 다뤄도 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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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2014년 7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도마 위에 놓고 난도질했던 미국 상원 청문회. 이 자리엔 포드차 부사장이 업계를 대표해 등장했다. 그는 “2년 전 한·미 FTA 재협상으로 미국 차에 대한 수입 규제가 없어지자 비관세 장벽이 도입됐다”며 한국 정부를 몰아쳤다. 이때뿐이 아니었다. 그는 자동차 분쟁이 터질 때마다 한국을 맹비난하는 단골 공격수였다. 2011년에는 “한국이 자유무역의 원칙이 뭔지 깨닫도록 미 행정부는 강제조치를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던 게 바로 그였다.

한국 공격하던 포드 간부가 대북 대표 #‘북한 핵보유 인정론’ 갈수록 힘 받아

누굴까? 바로 지난달 말 북·미 협상 창구로 임명된 스티브 비건 대북정책 특별대표다. 포드차의 대관업무 담당인 비건은 14년간 포드를 위해 한국 등 외국 정부를 족치던 인물이다. 의회와 행정부에서 외교를 다뤘다곤 하나 한반도와는 무관한 러시아 전문가다.

이에 비해 조셉 윤, 성 김, 글린 데이비스, 스티븐 보즈워스 등 네 명의 전임자는 모두 한반도 문제에 능숙한 전문가들이다. 그러니 “비건은 비적임자”란 소리가 안 나올 리 없다. 이뿐이 아니다. 올 초엔 북한 전문가인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가 미 대사로 오는 듯싶더니 해리 해리스 전 태평양사령관이 이 자리를 차지했다. 문외한들이 몰려오는 느낌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달 말 외교·안보 저널인 ‘포린 어페어스’에는 놀랄 만한 글이 실렸다. ‘북한의 핵 프로그램은 어디에도 안 간다’는 제목의 칼럼으로 “북한을 인도와 같은 책임 있는 핵보유국으로 만들자”는 게 결론이었다. 지난 7월 워싱턴포스트에도 비슷한 칼럼이 실렸다. ‘트럼프는 핵보유국 북한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게 골자였다.

최근 이런 현상은 그저 넘길 일이 아니다. ‘북한 핵보유국 인정론’이 갈수록 미 주류 사회에서 주목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인 까닭이다.

적잖은 진보학자들은 “북한이 핵을 쓰지 않을 것이며, 특히 같은 민족이 사는 남쪽은 절대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핵은 미국을 겨냥한 것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만든 게 그 증거라는 논리를 편다. 북한 주장 그대로다. 국민 정서를 보면 이런 주장도 무리가 아니다. 지난해 10월 갤럽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59%는 “북한이 핵무기를 쓰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전문가의 판단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얼마 전 강연장에서 만난 태영호 전 북한 영국 공사에게 “김정은이 남쪽을 향해 핵미사일을 쏠 가능성이 있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랬더니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북한에서 정권 전복을 위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남쪽에서 돕는다면 김정은이 핵폭탄을 쓸 공산이 크다”는 거였다. “고모부도 죽이는 포악한 성격인지라 가만히 죽겠느냐”는 이야기였다.

현 상황은 북한이 노리던 대로 북한의 핵보유국 인정 쪽으로 몰려가는 분위기다. “구체적인 비핵화 조치 없이는 종전선언은 없다”던 미국의 톤이 달라졌다. 이젠 “언제까지 핵·미사일 리스트와 비핵화 스케줄을 내놓겠다고 약속하면 종전선언을 검토할 수 있다”로 완전히 물러섰다.

트럼프 행정부가 언제든 한반도 문제에서 손 털고 나갈 위험은 커졌다. 미국의 국익만 따지는 북한 문외한들이 점점 외교 분야의 요직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당장 한국산 자동차 공격에 골몰했던 비건 특별대표가 노회한 북측 인사를 제대로 상대할지 걱정이다. 이런 판에 문재인 정부는 미국의 만류를 뿌리치고 북한과의 교류를 늘리는 데 신경을 쓰고 있다. 갈수록 북한의 비핵화는 물 건너가는 형국이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