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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게 같은 은행, 삐딱한 쉼터 … 튀는 건물은 이유가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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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9호 24면

한은화의 A- story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은 기이한 모양새로 한 도시의 운명을 바꿨다. 번쩍이는 티타늄 패널 3만여 장을 마구잡이로 휘어 만든 이 건물을 보러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린다. 그 덕에 쇠락해가던 공업도시 빌바오는 세계적인 관광도시가 됐다. 관광객들은 이 건물이 꽃처럼, 배처럼 보인다고 하는데 이를 설계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89)는 물고기를 생각하며 스케치했다고 한다. 항간에는 그가 종잇장을 구겨놓고 그 모양대로 지었다는 소문도 있다.

장애인용 램프 둔 수락행복발전소 #건축상 심사위원도 “선수들” 감탄 #삼성동 하나은행 플레이스 원 #초고강도 콘크리트로 외피 실험 #건축가 직관보다 논리로 디자인 #크기·비용·법규 등 치밀하게 계산

그러나 대다수 건물의 설계 방법은 구겐하임 미술관의 그것과는 다르다. 건축가가 예술가처럼 스케치하다 영감에 따라 모양을 결정 짓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건축가는 직관보다 논리로 디자인한다. 건물의 생김새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 치밀한 계산법이 숨겨져 있다. 서현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는 “프로젝트마다 주어진 조건 즉 땅 크기, 비용, 건축 관련 법규, 기후 등이 모두 맞아떨어지게 논리적으로 풀어나가다 보면 건축물의 형태와 공간이 결과적으로 나온다”고 설명했다. 최근 서울에서 완공된, 남다르게 생긴 건축물 두 곳에도 재미난 사연이 숨어있다.

장애인용 경사로가 건물 실내 에워싸

상계동 커뮤니티 공간인 수락행복발전소는 밖에서 보면 기울어진 것처럼 보인다. 장애인용 램프가 1층부터 3층까지 휘감아 올라가고 있어서 그렇다. 건축법상 바닥면적에 포함되지 않는, 일종의 서비스 공간이다. [사진 윤준환 작가]

상계동 커뮤니티 공간인 수락행복발전소는 밖에서 보면 기울어진 것처럼 보인다. 장애인용 램프가 1층부터 3층까지 휘감아 올라가고 있어서 그렇다. 건축법상 바닥면적에 포함되지 않는, 일종의 서비스 공간이다. [사진 윤준환 작가]

노원구 상계동 수락산 입구, 원래 무허가 단층 건물이 있던 자리였다. 노원구청이 땅을 매입해 지난 6월 동네 주민을 위한 3층 규모의 커뮤니티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그런데 모양새가 어딘가 낯설다. 길죽한 땅을 닮아 건물도 긴데, 밖에서 보면 바닥 면이 비스듬하다. 건물의 뒷부분이 들려 있는 모양새다. 건축가가 멋을 부리느라 삐딱하게 설계한 걸까 아니면 현장 공사를 잘못한 걸까. 건물 안에 들어가면 이유를 금세 알 수 있다.

수락행복발전소는 건물 가운데 공간을 두고 1.2m 너비의 장애인용 램프(경사도)가 1층부터 3층까지 휘감아 올라가는 구조다. 램프 길이만 95m에 달한다. 도서관·카페·방과 후 돌봄 센터·공연장·사무실 등 주민들이 요구하는 공간은 다양하고, 땅(296.93㎡)은 좁은데, 신기하게 램프 면적이 상당하다. 유왕식 수락행복발전소 운영위원장은 “램프 공간은 ‘덤’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아파트로 치면 서비스 면적으로 알려진 발코니와 같다는 이야기다.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 장윤규·신창훈(운생동 건축사사무소 공동대표)의 설명은 이렇다.

북 카페로 쓰이고 있는 1층의 모습. 1.2m 폭의 램프 덕에 공간이 넓어 보인다. [사진 윤준환 작가]

북 카페로 쓰이고 있는 1층의 모습. 1.2m 폭의 램프 덕에 공간이 넓어 보인다. [사진 윤준환 작가]

“공공 건축물의 경우 2층 이상만 돼도 무장애 공간으로 엘리베이터를 둬야 하는데, 엘리베이터와 계단실이 차지하는 공간이 상당합니다. 구석에 놓여 죽은 공간이기도 하고요. 땅이 작은데 넣어야 할 프로그램이 많아 공간을 더 늘릴 방법을 고민하다가 장애인용 램프를 건물 전체에 길처럼 둘러보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건축법에 따르면 장애인용 램프 면적은 바닥면적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완만한 기울기의 램프가 공간을 둘러싸면 마치 그 램프가 내부 공간인마냥 넓게 느껴질 테고, 엘리베이터 같은 죽은 공간을 두지 않아도 돼고요. 램프는 1층부터 3층까지 이어지는 주요 동선이고, 벽면은 갤러리로 삼을 수도 있고, 호기심 많은 아이들의 놀이터로 쓰일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법적인 제한 요소였던 램프를 디자인 요소로 활용한 거죠.”

바닥면적으로 계산되지 않는 램프 덕에 건물은 대지 안에 거의 꽉 찬 형태로 들어섰다. 건축가들의 영리한 법 해석에 최근 서울시 건축상 심사를 위해 방문한 심사위원들은 “선수들”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수락행복발전소의 안은 미로 같다. 정글짐 같기도 하다. 램프를 따라가다 보면 반 층씩 엇갈리게 쌓은 ‘스킵 플로어(skip floor)’ 형태로 층층이 올라가는 각 공간과 계속 만난다. 일부 계단에는 쿠션을 둬서 의자로 쓰니 사람들이 모이는 커뮤니티 공간에 제격이다. 작은 건물이지만 허투루 버리는 공간이 하나도 없다. 대신 바닥 높이가 다양해 공사는 쉽지 않았다. 장윤규 대표는 “10개월로 예상했던 공사 기간이 1년 반이 걸렸지만, 건설사가 끝까지 작업해 새로운 공간이 탄생했다”고 전했다.

178개 ‘아트 디스크’ 건물 자체가 예술품

건축가 김찬중이 리모델링한 서울 삼성동 ‘KEB하나은행 플레이스 원’. 문어 빨판처럼 보이는 초고강도 콘크리트로 만든 외피 안에는 넓은 테라스가 있다.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직사광선을 받지 않고 쉴 수 있는 바깥 공간이다. [사진 김용관 작가]

건축가 김찬중이 리모델링한 서울 삼성동 ‘KEB하나은행 플레이스 원’. 문어 빨판처럼 보이는 초고강도 콘크리트로 만든 외피 안에는 넓은 테라스가 있다.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직사광선을 받지 않고 쉴 수 있는 바깥 공간이다. [사진 김용관 작가]

새로운 형태의 건물은 언제나 눈물겨운 실험 끝에 탄생한다. 삼성동 무역센터 인근에 자리한 KEB하나은행 플레이스 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건물은 하얀 문어 빨판으로 뒤덮인 듯하고, 멍게 같기도 하며, 사방으로 입을 삐죽거리고 있는 생명체 같기도 하다. 이 수상한 건물은 원래 은행의 전산센터였다. 흔히 볼 수 있는 네모난 유리 커튼월 건물은 1년 반가량의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컬처 뱅크’로 재단장했다. 온라인 뱅킹으로 점포 방문객 수가 줄자, 은행과 문화공간을 결합해 복합공간으로 전환하는 첫 시도였다.

프로젝트를 맡은 건축가 김찬중(건축사사무소 더시스템랩 대표)은 “기존 사무 공간에 새로운 콘텐트를 더하는 프로젝트였지만 무엇보다도 일하는 사람들이 편안한 공간을 만드는 게 가장 중요했다”고 전했다. 은행 측을 설득해 건물 전 층의 삼면에 테라스를 만들었다. 바람도 쐬고, 햇볕도 즐길 수 있는 외기 공간을 위해서다. 그리고 테라스를 감싸는 동그란 창이 숭숭 뚫린 껍데기를 하나 더 뒀다. 이른바 ‘이중 외피’ 구조다.

상어 지느러미처럼 보이는 실내 계단은 간접 조명을 위해 특별히 제작했다. [사진 김용관 작가]

상어 지느러미처럼 보이는 실내 계단은 간접 조명을 위해 특별히 제작했다. [사진 김용관 작가]

차양효과를 위해서 고안했다는데, 건축가는 그냥 창만 내는 게 아니라 구멍 자체를 입체감 있게 제작했다. 밖으로 1m가량 튀어나오고, 안으로 50㎝ 들어가는 동그란 창의 패턴이 올록볼록 반복되는 식이다. 김 대표는 “깊이 있는 창을 통해 실내에 간접광이 은은하게 들어와 에너지 절감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며 “밖으로 튀어나온 창에는 그래픽 디자이너가 만든 178개의 ‘아트 디스크’를 걸어 건물 자체가 예술품이 되게 했다”고 덧붙였다. 이 디스크는 2년마다 교체할 계획이다. 옛 디스크는 전국 178개의 주요 지점에 보내 ‘컬처 뱅크’를 상징하는 로고처럼 쓰게 한다는 복안이다. 그러니까 문어 빨판 같은 외피는 테라스, 차양 효과, 예술작품 장착이라는 3차 방정식을 풀어낸 결과다.

이를 완성하기 위해 건축가는 국내 최초의 시도를 더했다. 울퉁불퉁한 외피 자체를 철근이 필요없는 초고강도 콘크리트(UHPC·Ultra-High Performance Concrete)로 만든 것이다. 공장에서 만들어 현장에서 조립했다. 김 대표는 “UHPC는 일반 콘크리트보다 비싸지만 고강도여서 철근이 필요 없는 구조체 역할을 할 수 있고 두께도 얇아 모양을 자유롭게 낼 수 있는 강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최초인 만큼 실패의 연속이었다. 만족할 만한 강도가 나오지 않아서, 표면이 매끄럽지 못해서, 현장 조립하다 깨져서…. 건축가·건축주·시공자 모두가 자포자기하여 이 최초의 UHPC 모듈 제작을 포기하려 할 즈음, 5번째인 마지막 실험에서 성공했다.

왜 이런 힘든 실험을 하는 걸까. “콘크리트가 천처럼 얇으면서도 그 자체로 아주 강한 소재가 되면 우리 건축 환경에 큰 변화가 생길 것이니 그 길을 내고 싶었다”는 게 건축가의 소회였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새로운 콘크리트 공간이 탄생했다. 생명체 마냥 표정이 풍부한 이 컬처 뱅크는 오후 11시까지 문을 연다.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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