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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최고의 지식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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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대학에서 강의하는 사람 몇몇과 어울려 저녁을 먹었다. 그 자리에서 우리 시대 최고의 지식인은 모 포털사이트의 지식검색이라는 말이 나왔다. 요즘 대학생은 보고서의 자료 출처를 책 이름 대신에 사이트 주소를 적는다고 했다. 블로그 페이지까지 검색한 경우는 그나마 성의가 넘치는(?) 학생이라고. 궁금해서 나도 지식검색 사이트에 들어가 "인문학은 위기인가"라고 물어봤다. 물론 우리 시대 최고의 지식인은 인문학이 왜 위기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 다만 그걸 읽으려면 1200원을 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주제를 놓고 다운로드한 숫자를 보니 두 번에 불과했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건 별로 경제성이 없기 때문에 조만간 우리 시대 최고의 지식인께서는 이에 대해 곧 입을 다물 것 같다. 대신에 그분은 이력서나 자기소개서 작성법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이력서 쓰는 방법에 대해서는 210건이 넘는 답변이 있었고 대부분 100번 이상씩 팔려나갔다. 아연실색한 내게 우리 시대 최고의 지식인은 "문제는 경제인 거야, 이 멍청이야"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 최고의 지식인은 정직하다. 취업과 성장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지식 따위는 헛된 것에 불과하며 도태되는 게 옳다고 암시한다.

물론 나는 멍청이가 아니므로 경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쫄쫄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책을 끼고 살겠다는 각오 따위는 내게 없다. 나는 풍요롭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풍요와 경제성장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우리 시대 최고 지식인은 "경제성장이 꼭 풍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친절하기도 하여라. 그분의 말씀대로 풍요롭게 살고 싶다는 내 소망이 반드시 국가 경제를 발전시켜야만 이뤄질 수 있는 건 아니다.

타이타닉 현실주의라는 말이 있다. C 더글러스 러미스가 '경제성장이 아니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책에서 쓴 말이다.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는 경제를 발전시켜야만 한다는 주장을 그는 빙산을 향해 돌진하는 타이타닉호에 비유한다. 타이타닉 현실주의에 따르면 곧 빙산에 부딪치므로 타이타닉호를 당장 멈춰야만 한다고 말하는 건 요리를 만드는 요리사나 엔진에 연료를 주입하는 선원에게는 비현실적이고 비상식적이다. 타이타닉호가 멈추게 되면 요리사나 선원은 더 이상 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중요한 건 경제가 아니라 당신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런 딜레마에 대해 러미스는 삶에서 경제라는 요소를 조금씩 줄여나가자고 주장한다. 시장 바깥에서 즐거움을 찾자는 소리다. 그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즐거움을 누리자고 주장한다. 아무도 다운로드하지 않을 이런 답변을 러미스가 서슴지 않는 까닭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가 아니라면, 그게 우리의 중요한 문제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기업의 돈을 빼돌린 사주가 구속되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경제를 걱정한다.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만 하는 규범이나 가치도 그 순간만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그건 국가 경제와 삶의 풍요로움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내게는 의문이 하나 있다. 이 몇 년 동안 우리 경제가 난파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하지만 외국에 나가면 몇 년 전에 비해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정한다. 이 모든 것이 밤낮없이 경제활동에 매달린 기업인 덕분이다. 그렇다면 난파된 것은 무엇일까? 그건 우리가 소망했던 풍요로운 삶이 아닐까? 이 물음에 대해 우리 시대 최고 지식인께서는 묵묵부답이다.

김연수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