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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다]⑦ 배심원 만장일치 유죄 준 '노모 폭행치사죄'···왜 무죄 됐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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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가 저기… 죽은지 살은지 모르겠어예."
2015년 10월의 어느 금요일 밤, 119로 한 60대 남성이 다급한 전화를 걸어옵니다. 신고가 들어온 곳은 경상북도의 면(面) 단위 농촌 마을의 작은 기왓집. 10분만에 출동한 지역 소방대원이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이불에 덮인 채 웅크려 있는 86세 할머니였습니다.

배심원은 유죄, 대법은 다른 판단

할머니는 큰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숨졌고, 홀로 어머니를 모셨던 60대 아들이 용의자로 지목됩니다.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누웠던 안방 이불에선 피와 토한 흔적, 빠진 틀니, 머리카락 뭉치가 나왔습니다. 족적과 지문 검사도 해봤는데 외부인의 흔적은 없었습니다. '치매 노모를 아들이 때려 죽게 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갈 만 한 상황이었습니다.

열 네명의 확신: 일곱 배심원과 여섯 판사 그리고 부검의  

1심은 대구지법에서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습니다. [중앙포토]

1심은 대구지법에서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습니다. [중앙포토]

1심은 대구지법에서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습니다. [중앙포토]

일 년 넘는 수사 끝에 아들 노모(63)씨가 '존속상해치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집니다. 1심은 대구지법 형사12부(부장 정재수) 심리 하에 배심원들이 유무죄 의견을 내는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습니다. 당시 출동했던 소방대원과 응급실 의사, 시신을 부검한 의사와 그 내용을 감정한 의사가 법정에 나와 배심원들 앞에서 차례로 증언을 했습니다.

할머니 얼굴 쪽에 타박상이 매우 심했는데, 보호자인 아들은 '넘어졌다'고 했습니다. 넘어졌으면 찰과상이 있어야 하는데 넘어진 상처 같지 않아 몇 번을 물어봤는데 계속 같은 대답이었습니다. 당시 아들은 술에 취해 있었고, 구급차 뒤에 둘만 있는 상황에서 자극할까봐 더 묻지 못했습니다.(출동했던 소방대원)"

"얼굴 앞쪽으로 굉장히 강한 힘이 가해졌던 것 같습니다. 입 안쪽 아랫입술·윗입술 전부 멍들어있었습니다. 뼈가 굉장히 여러 조각으로 부서졌고, 응급실에서 보기 어려운 일인데, 눈 위쪽 안구를 싸고 있는 뼈까지 부러졌습니다. 부검 실무상 넘어져서 저렇게 뼈가 부러진 것은 본 적이 없습니다. 폭행이라고 봅니다.(부검의)"

배심원 7명은 만장일치로 '유죄'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재판부도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에, 배심원들 의견대로 유죄를 인정하고 징역 6년형을 선고합니다. 노씨 쪽 국선변호인은 형이 너무 무겁다고, 검찰은 형이 너무 가볍다고 항소했습니다.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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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대구고법 형사1부(부장 박준용)는 이 사건을 "노씨가 어머니의 머리채를 잡고 얼굴 부위를 어딘가에 내려찍어 두개골과 목뼈가 부러지게 해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라고 보고 징역 10년형을 선고합니다.

의심스러운 정황들은 여럿 있었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날, 어머니는 마을회관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먼저 집에 와 있었고 아들 노씨는 저녁식사를 하러 나가 친구와 둘이서 소주 세 병을 나눠 마시고 오후 9시20분쯤 집에 왔습니다. 119 신고를 한 건 10시 50분입니다. 1시간30분동안 무엇을 했냐고 묻자 노씨는 '양념장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파를 몇 뿌리 뽑아서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마당에 있는 쓰레기통 앞에서 파 겉껍질을 손으로 벗겨내 버린 다음, 현관 댓돌 계단을 올라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 마루로 들어갔습니다. 제 방 텔레비전을 켜고 다시 마루로 가 츄리닝으로 갈아 입었습니다. (...) 마루에서 밖을 보니까 너무 깜깜해 간장을 뜨기 곤란하겠다고 생각해 그냥 부엌으로 가서 다듬은 파를 그릇에 담아 냉장고에 넣은 후 도마와 칼을 씻었습니다. 그 후에 쉬기 위해 마루로 나와 방으로 가던 중 모친 방을 지나가는데, 뭔가 예감이 이상했습니다.(...) ‘엄마요’ 불렀는데 모친을 보니 두 손을 이마에 대고 엉덩이를 위로 쳐들고 이마를 바닥에 대고 있었고, 피가 흥건하게 엉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제가 정신이 없었습니다.(노씨의 검찰 진술)"

재판부는 노씨 말대로 현장 검증도 해봤지만 "20분 정도면 충분한 행동"이라 봤습니다. 그럼 나머지 1시간에 대한 알리바이가 없습니다. 어머니가 이불에 덮인 채 발견된 것도 문제였습니다. 재판부는 "노씨가 이불을 들춰 어머니의 상태를 확인했음에도 다시 이불을 그대로 덮은 후 119에 신고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봤습니다.

폭행 관련 일러스트. [중앙포토]

폭행 관련 일러스트. [중앙포토]

폭행 관련 일러스트. [중앙포토]

이불에선 머리카락 두 뭉치가 나왔는데 재판부는 "머리채를 잡고 폭행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했습니다. 노씨의 이복 형제는 경찰에서 "(노씨가) 술만 먹으면 폭력적이다. 전처도 그렇고 자기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고 했습니다. 노씨가 소방대원을 붙잡고 자신이 기초생활수급자 심사에서 탈락한 것을 하소연한 것도 불리한 정황이 됐습니다.

"어머니가 이웃 참외농사를 도와주고 돈을 좀 벌어오긴 하였으나, 그마저도 건강이 좋지 못해 그만두게 되자 노씨 입장에서는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어머니를 원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 당일 마신 술과 경제적 어려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어머니에게 상해를 가한 것으로 보인다. (2심 판결문 중)"

"의심스러워 보여도, 아닐 가능성 있다면…" 뒤집힌 판결

1·2심에서는 중요하게 인정되지 않았지만, 부검기록을 토대로 감정한 다른 의사는 "피해자가 넘어져서 장롱 등에 부딪혀 상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습니다. 검찰 쪽에서 감정을 의뢰한 법의학과 교수였습니다. "여러 차례 충격으로 뼈가 부러졌을 것"이란 부검의 의견과 달리, 교수는 "눈 주변 뼈는 전부 붙어있기 때문에 1회의 강한 충격으로도 여러 조각으로 부서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장롱 문짝엔 안으로 말려들어간 흔적이 있었습니다. 오래된 장롱인데도 그 부분만 하얀 색으로 돼 있는 걸로 봐선 최근에 생긴 겁니다. 교수는 이 일을 폭행 '사건'이 아닌, 할머니가 넘어지면 생긴 불행한 '사고'로 봤습니다. "사람 주먹이 아무리 세도 사람 뼈를 잘 못 부순다. 정지된 물체에 부딪히는 충격이 사람 주먹보다 더 강하다"는 게 교수의 의견입니다. 이불 위 혈흔이나 토한 자국, 머리카락 뭉치도 넘어지는 사고로 설명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고요.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문턱쪽에서 안방으로 들어가다 어떤 발이 걸려 앞으로 넘어진다. 장롱 벽 아래쪽에 이마를 부딪히고, 그 충격에 목이 뒤로 젖혀져 경추골절이 일어난다. 뇌진탕이 오고 뇌압이 올라가 극심한 두통과 함께 토하게 된다. 머리카락 뭉치는 머리가 몹시 아프니까 스스로 뜯은 것이다. 누군가 폭행하다 뽑힌 거라면 손을 털어 흩어버리지 뭉치째로 내려놓겠나. 또 아무리 노인이라도 자신을 때리고 있으면 죽을 힘을 다해서라도 막는데, 방어흔이 전혀 없다.(감정의 법정 진술)"

부검의는 '유영철 연쇄살인사건' 피해자들을 포함해 17년째 국과수에서 부검을 해 온 베테랑이었고, 감정의는 '개구리 소년' 유골과 2002년 대구 지하철 방화참사 사망자들을 부검한 30년차 교수였습니다. 대법원 3부(주심 조희대 대법관)는 2월 "과연 검찰 공소장대로 노씨가 어머니의 머리를 잡고 내리찍어 부딪치게 하여 생긴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며 사건을 다시 심리하라고 내려보냅니다. 결국 대구고법 형사2부(부장 이재희)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상반되고, 그 중 어느 한쪽에 우월한 가치를 부여하기 어려운 점" 등을 토대로 무죄를 선고했고, 지난달 26일 확정됐습니다.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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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먼젓번 재판에서 유죄 근거가 됐던 의심스런 정황들은 어떻게 설명이 될까요? 최종 확정된 판결문 내용대로라면 이렇습니다. 귀가 후 행적이 불명확했던 것은 "비틀거리며 귀가할만큼 취해 있었으므로 기억 못 할 수 있고, 특이할 것 없는 일상적 행동으로 시간을 보냈다면 명확히 설명하지 못할 수도 있다"로, 어머니가 이불을 덮여 있던 것은 "이불을 들춰 보고 피를 흘리고 있는 어머니를 발견해 놀란 관계로 피해자를 편하게 눕히는 행동을 하지 못하고 바로 신고할 수도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씨가 술만마시면 폭력적이란 이복형제의 진술도 있었지만, "평생 어머니를 잘 모셔왔고 어머니도 오빠를 끔찍이 여기고 서로 사이가 좋았다"는 여동생 진술도 있었습니다. 기초수급자 탈락은 어머니와 관련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치매가 있었지만 초기였고 스스로 거동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평생 모신 어머니를 잔혹하게 폭행할 뚜렷한 동기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노씨를 재판에 넘긴 검사도 이 부분을 명확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진실은 멀고 정황은 가까울 때

대법원 대법정 전경. [중앙포토]

대법원 대법정 전경. [중앙포토]

대법원 대법정 전경. [중앙포토]

국민참여재판 배심원들이 만장일치로 내린 결론이 뒤집히는 일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보통 형사사건은 2심에서 1심 판결을 깨는 비율이 41%정도인데, 1심이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사건은 이 비율이 30%에 못미칩니다(2008~2016년, 대법원 자료). 국선으로 선정돼 노씨의 변호를 맡았던 윤태원 변호사는 "배심원단의 만장일치 편결에 대해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대법원 판례고, 실제로 법원이 배심원단과 다른 판단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대법원이 판결을 뒤집은 것은, '의심스러운 정황들'만으로 '징역 10년'을 살게 할 순 없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에는 범행 현장 영상이라든지 목격자라든지 아니면 피고인이 스스로 범행을 자백했다든지 하는 '직접 증거'가 없습니다. 틀니나 머리카락이 빠져있다거나 뼈가 부러진 흔적이 있다거나 두 모자가 평소에 어땠다거나 하는 증언은 모두 '간접 증거'일 뿐입니다. 물론 간접증거라고 증거가 아닌 건 아니지만, 간접증거만으로 유죄를 인정하려면 보다 확실해야 합니다.

"간접증거를 가지고 유죄를 인정하기 위하여는 범행의 동기, 범행수단의 선택, 범행에 이르는 과정, 범행 전후에 나타난 피고인의 태도 등 여러 간접사실로 보아 피고인이 범행한 것으로 보기에 충분할 만큼 압도적으로 우월한 증명이 있어야 한다. (...)고의적으로 범행한 것이 아닐 가능성을 확실하게 배제할 수 없다면(...) 피고인은 무죄로 추정된다는 것이 헌법상의 원칙이다.(2017년 대법원 판결 중)"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판결다시보기 시리즈◈

※‘판다’는 ‘판결 다시보기’의 줄임말입니다. 중앙일보 법조팀에서 이슈가 된 판결을 깊이 있게 분석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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