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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언론숙청·통폐합|하루아침에 "쑥밭"된 기협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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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계엄검열 전면거부는 정말 대단한 용기였다. 그러나 5·17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로 단 하루만에 물거품이 됐다.
세상이 달라진 것이다. 서울의 봄을 휘감고 있던 「안개」가 걷히면서 신군부의 실체가 드러났고 각계인사에 대해 철권이 퍼부어졌다.
행동을 개시한 계엄사의 언론계에 대한 첫조치는 검열강화와 검열거부를 주도한 기협간부들의 검거였다.
기자협회의 정교용·고영재·이수언·이홍기부회장, 박장삼감사, 김동선편집실장·안량노기자등이 연행됐다. 낌새를 알고 도피한 김태홍회장과 노향기부회장, 이병주 동아투위위원장, 정태기 조선투위위원장등은 국기문란·시위배후조정등의 혐의로 전국에 수배됐다.
정교용씨(현 중앙일보문화부차장)의 회고.
『18일 새벽 계엄사요원 3명이 집에 들이닥쳤읍니다. 남영동대공분실로 끌고 가더군요. 몇대 얻어맞았읍니다. 연행된 동료기자들은 아주 심하게 당했지요. 김회장의 소재와 검열철폐결의 경위등을 대라고 했고 무엇보다 기협등 언론계와 김대중씨와의 관계를 캐려들었읍니다. 20여일만에 나오니 딴세상이 됐더군요.』
이렇듯 한때 움트던 자유언론의 맹아는 쓰러져갔다.
그 엄청난 광주의 비극을 목격하면서도 제때 제대로 쓰지못하는 세상이 된것이다.
『진상을 그대로 알리지 못하느니 차라리 신문제작을 말자』는 제작거부운동이 언론사단위로 전개됐으나 지속될수가 없었다.
6월9일 광주사태를 무력평정한 신군부는 이기간중 제작거부운동을 주도했거나 광주현장취재를 했던 기자들을 유언비어날조·용공혐의로 체포했다. 함부로 입을 열지말라는 대언론 경고장이었다.
그 본보기로 경향신문의 서동구조사국장·이경일외신부장·홍수원기자·박성득기자 MBC의 노성대보도부국장·오효진기가 동아일보 심송무기자등 9명이 1차 연행뵀다(표완수기자등은 그후 구속). 노씨(현 광고공사 연구위원)의 회고.
『광주일고후배인 기협회장 김씨와 대질신문할게 있다며 연행했읍니다. 눈가리개를 벗기는데 보니까 남영동 분실이었읍니다. 조사실에 들어서니 칠성판·가죽밴드등 각종 고문기구가 널려있었읍니다.
「다른데 가면 더 혼다니 여기서 불라」며 최근 움직임을 죄다 진술하라고 하더군요. 닷새동안 잠을 안재우고…. 김대중씨와 동향인 내가 경향팀과 무슨 일을 꾸몄느냐는 거였지요.
내가 연행된것은 5월23일 밤 9시뉴스때 이득렬앵커가 「폭도에 의해 불타고 있는…」이라고 한데 대해 「말조심하자」고 울분을 토했던게 계엄포고령 10호위반이라는 거였읍니다.
10호는 유언비어 날조및 유포를 금하고 유언비어가 아닐지라도 북괴와 동일한 주장및 용어사용을 규제하고 있었는데 그때 북괴는 광주태를 「의거」라고 보도했었읍니다. 이들은 김대중씨에「포섭」돼 언론계에 침투한 주모자로 서동구씨와 나를 찍었던 모양인데 김씨와 대면한 사실조차 없음이 확인되자 8월3일 풀어줬읍니다. 언론인으로 유일하게 공소취하된 케이스지요. 그후 3년간 정부의 압력으로 직장도 구하지 못한채 떠돌았읍니다.』
홍수원씨(현 한겨레신문 특집기획부장)는 당시의 구타·고문행위는 이제 되뇌이기 조차 싫다고 했고 이경일씨(현 국민일보특집부장)는 억지 빨갱이를 만들려고 고문을 하는 바람에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고 했다.
이씨의 증언.
『노랑색·빨강색으로 칠해진 취조실로 데려가더군요. 「김대중이한테 돈 받았느냐」고 묻고는 주로 용공부분을 집중 추궁했읍니다. 「고려연방제를 찬양하지 않았느냐」는 등 몽둥이 찜질을 하는데도 별게 안나오자 고문실로 옮겼읍니다. 「만들어 놓은 조서에 무인만 찍으면 된다」고 회유하기에 거부하니까 팬티만 입힌채로 칠성판에 묶더군요. 한말들이 주전자의 물을 계속 얼굴에 붓고 한쪽에서는 방망이로 발바닥을 때렸읍니다.
나중에는 전기고문도 하겠다고 협박했읍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해 무인을 찍어줬읍니다. 배를 누르자 물이 쏟아져 나왔고 소변은 핏물이었읍니다. 그뒤 용공서적 한권만 대라고 윽박지르기에 「밀러번·질스」(전유고부통령)의 「새로운 계급」을 댔읍니다. 이 책은 사실 공산주의 비판서적이거든요.
그들은 이 책을 근거로 반공법을 적용했다가 2심에서 반공법 저촉부분이 무죄가 되자 꽤씸죄를 적용, 포고령 10호위반의 최고형량인 3년을 선고했읍니다. 서대문구치소·대전교도소를 전전하다 81년5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읍니다.』
정치인·공무원의 재산환수·숙청등이 한창이던 7월30일 신군부는 신문협회가 「언론자율정화와 언론인자질향상에 관한 결의」를 하도록 한 다음 7백11명의 언론인을 숙청했다.
또 연행·구속했던 김동선·박정삼씨에게는 불법출판등 포고렴위반혐의로 징역3년을 각각 선고하는등 4명에게 실형을 선고하고(8월2일) 김태홍기협회장을 내란예비음모혐의로 군재에 회부했다.
그러나 언론인에 대한 탄압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해 12월30일 계엄사는 군관련 유언비어 날조혐의로 CBS의 정성진(전정치부차장·기협회장) 한용상기자등 언론인 2명과 민간인 2명을 구속하고 손주영씨(CBS경제부차장)를 수배했다.
손씨의 회고.
『그때 문제된 유언비어란 육사생들이 데모를 했고 몇명이 할복했으며 군부내 암투로 고위장성 여러명이 연금됐다는등 세가지였읍니다. 대통령이 광주순시도중 피격당했다는 것도 그 하나지요.
우리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고 하는데 실은 언론통폐합당일인 11월30일 동료 7∼8명이 한씨를 위로하러 갔다가 이춘발씨(현기협회장)등 몇명이 대포집에 가 울분을 토했을뿐입니다.
육사생데모얘기는 널리 퍼졌던것이고 나머지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통폐합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악성유언비어가 자꾸 번지자 뒤집어씌운 것입니다.』(정·한 두사람은 심한 고문을 받았으며 실형을 선고받고 고등군재에 항소중 5개월만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한씨는 캐나다로 이민, 목사로 활동증이며 정씨는 번역일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모든 언론인은 눈·귀·입을 막고 조용히 일이나 하라는 의미였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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